[안상목회계사]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 3

전문가 칼럼

[안상목회계사]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 3

마르크스는 필요한 것만 생산하는 체제를 통하여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한편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노동하기 때문에 살 권리가 있다(1)” 하는 인생관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에도 진실은 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터득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곳으로부터 태어나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찾기 전에는 그것을 찾기 위해서 살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찾고 나면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살고, 죽음을 맞으면 (일단 여기서는) 더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앞 문단과 같은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는 법도 없고, 삶의 의미에 관한 논리와 살 권리에 과난 논리가 같은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인류 공동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람은 노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살 권리가 있다.(2) 공동의 유산이란, 예를 들면 공짜로 주어진 기술이다. 


생산물의 가치는 자본과 노동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발판, 예를 들면 공짜로 주어진 기술 같은 것에서도 온다. 따라서, 자본도 노동도 제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생산물의 가치의 일부를 나누어 받을 권리가 있다. 이러한 논리는 세계인권선언의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경제학적 근거가 된다. 


공짜로 주어진 기술, 자유와 평화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 등 무척 진보된 문명의 발판만이 아니라 언어와 도덕성 같은 기초적인 능력까지도 실지로는 생산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류 공동의 유산이다. 세금은 이러한 공동자산의 사용료 및 유지비다. 


기술은 때때로 공짜가 아니다. 예를 들어 건설공사의 인건비 하청업의 경우를 본다. 일정 장소에 일정 사양(specification) 일정 부피의 콩크리트 타설 작업을 위한 하청계약에서, 그 공사에 “필요한” 표준적인 노동시간과 콩크리트 타설공의 표준적인 임금은 계약 금액 결정의 기준이 된다. 


(각국의 건설업체들은 그 시대의 표준 임금을 계산하는 소위 “품셈표”를 가지고 있다.) 그 기준이 곧 계약상의 콩크리트 속에 들어 있는 인건비 부분의 가치다. 이것이 노동가치설의 뼈대다. 마르크스는 필요한 만큼의 인력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만일 앞 문단의 계약에 사용된 사양(specification)이나 도면이 잘못되어 있었다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콩크리트 구조물의 가치는 마이너스 값을 가지게 된다. 그 구조물이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라면, 후일 원자력 사고로 인하여 발생하는 손해는 계산하기조차 힘들다. 구조물 전체의 가치가 마이너스일 때 그 속의 노동시간 가치만을 따로 떼어내어 가치 있다 할 수는 없다. 


헛일의 결과는 가치가 없다. 이 이야기를 거꾸로 보면, 그 콩크리트 구조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적 자본재도 아니고 인력도 아닌) 설계기술이다. 설계기술의 수준이 높을수록 잘못된 경우의 위험도 크고, 그 기술의 가치도 크다.


기술 사용료의 지불이라는 행위만을 보면, 돈이 갑의 주머니에서 을의 무너니로 흘러갈 뿐이다. 이런 것을 보고 마르크스는 “매매는 아무런 가치도 창출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기술료가 지불된다는 것은 그 기술이 사용된다는 뜻이다. 기술의 사용은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지만, 그 기술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다. 잘 개발된 기술은 반복해서 팔려 나가고, 그 재미에 기술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 


여기서, 그 기술도 결국 노동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의 노동은 노동가치설과 무관하다. 노동가치설이란, 노동이 많으면 가치도 크다는 뜻이다. 한번 쏟은 노동의 결과로 기술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기술이 팔릴 때마다 추가의 노동 없이 계속 가치가 창출된다. 기술이 팔린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기술을 사용한 제품의 시장 적합성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시장 작합성은 대체로 두 방향에서 발견된다. 하나는, 생산의 능률을 높이는 방향. 또 하나는, 여유 있는 자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방향.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1848)에서 저 첫번째 방향을 (과잉생산을 유발하는) 지나친 문명이라 했다. 반면, 고타강령비판(1875)에서는 충분한 생산력을 완성된 공산사회의 필수요소로 보았다. 


이론의 뿌리가 없으니 주장에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두번째 방향을 사치라고 보았고, 마르크스는 모든 사치를 배격했다. 한 때는 책 한 권도 사치였음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했던 것이다. 과잉생산과 사치의 관계는 칼럼 671호부터 11개의 칼럼에 정리되어 있다. 


과잉생산과 사치 1: https://blog.naver.com/samahncpa/22211083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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