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예측 가능한 죽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예측 가능한 죽음

누군가가 예측할 수 있는 고난은 진정한 의미의 고난일 수 없다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있는 곤고 때문에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수많은 사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측 가증한 고난은 예측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우울증을 도발한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아니더라고 우리 인생은 모두 죽음을 예측하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주변을 항상 정돈하며 산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심심하지 않게 만나곤 합니다.


그런데 한편 죽음을 대비하며 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루살이에게는 오늘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산 자 각자의 몫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주어진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그것에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그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빨리 죽고자 합니까.


그래서


안락사를 주장하는 분들도 꽤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분들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빨리 창조주 앞에 서기를 원하심입니까.


아니면


그냥 구차한 삶을 끝내겠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 땅에는 그 누구도 창조주 앞에 설 준비가 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전권이라 주장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구차한 모습을 누가 결정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구차함이라고 정의합니까.


구차함조차도 최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난제에 봉착합니다.


우리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 수밖에 없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성입니다.


죽음이란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실체입니다.


 


죽음이 너무나 두려워서 아예 생각도 안 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은 것이 잘 죽는 것입니까.


날마다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즐거움이란 존재하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싫증 나지 않는 즐거움이란 이 땅에 존재합니까.


재미와 즐거움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재미없는 즐거움은 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확실히 예측되는 우리의 죽음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고 싶어집니다.


행복한 이별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 장엄함과 화려함이 그 누구에게도 행복함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것은 때로 의로울 수는 있지만 죽은 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그날을 언제, 어떻게 맞이하던지 그 무게감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 누구에게나 기필코 이르지만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추모하며 참으로 길지 않게 앓다가 가서 좋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여러모로 편리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병치레가 길거나 짦짧거나이 호, 불호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편 116편 12-12~19절에와께서 성도의 죽음을 귀히 보시는보시는도다라고하였습니다.


이 시의 작가는 어떤 의도로 이렇게 기록하였다고 여겨집니까.


 


,성도의 죽음>이라고 하면 누가 가장 먼저 연상됩니까.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님이 떠오릅니다.


스데반스데반 집사님의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보인 것은 무슨 연유이겠습니까.


모세가 40주40주야를  호렙산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체험하고 내려올 때는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운 것이 기억됩니다.


 


은혜받은 자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남을 부인할 수 없음입니다.


 


살아온 인생 그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간섭이요, 은혜임을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직면하는 그순간 이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보였다는 고백을 자주 듣곤 합니다.


 


그런 것을 경험한 자의 삶은 과연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마치 우리의 정신없이 사는 삶이 하나도 지워지지 않고 기록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건망증이 치매로 이어질까 진정으로 염려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실상은 하나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인 것 같습니다.


나에게서 지워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기억이 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서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삶을 사는 우리 되길 기원합니다.


 


죽음의 순간이란 우리의 민낯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총체적으로 들어 내는 때라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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