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공평하신 하나님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공평하신 하나님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타자성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됩니까.

우리는 언제 우리 믿음의 선각자들이 걸어간 길이 참으로 부럽습니까.


그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충 앞에 있을 때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심정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과 같은 고초는 외면하고, 저들의 영광과 희열에만 동참하고자 하는 이 이중성의 인격을 지닌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선각자들은 어떻게 그 인고의 때를 잘 걸어갈 수 있었는가 하는 의아함이 들지 않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결, 그 비장의 무기가 그들에게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에녹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고, 바울은 온갖 지성을 다 가진 냉혈안적인 인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배드로는 수시로 예수님을 부인하던 사람이었고, 야고보는 단순히 예수님의 장래를 염려하던 혈육의 동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드디어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우리가 보기에도 못 마땅한 면이 저절로 들 추어지는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조상을 가진, 아니 그들로부터 이어진 후손일 뿐입니다.

우리의 기록은 정사이든 야사이든, 결국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이 사실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로부터 “아버지 하나님”이라 불리워지시기를 원하셨는지 알 수 없음입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우리가 천성에 이르러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직면하기 전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음이 정답일 것 같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은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배타적 구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을 수는 있지만, 그것 없이 이해할 수는 없는 제한을 지닌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소용없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수 많은 발버둥침을 시도해 본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작년에 숙모께서 돌아가셔서 홀로 되신 작은 아버님과 전화 통화를 하였습니다.


작은 아버님은 올해 86세신데 무척이나 외로움을 느끼시며 때로는 스스로 우리 할머니께서 계신 곳으로 빨리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86년 인생을 살아오며 참으로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 나름대로 애썼지만 지금 밀려오는 고독감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이 땅에 살아오시면서, 알고 지은 죄, 혹은 모르고 지은 죄 때문에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까지 여겨진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왜 바르게 살려고 애쓰냐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내가 누리는 행복스러움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바르게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새벽형 인간이 바른 것입니까.

낮과 밤을 바꾸면서까지도 눈코 뜰 새 없이 사는 것이 바른 것입니까.,


아동바동, 허겁지겁, 빨리 빨리, 중국의 만만디 중 어느 것이 바른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심사숙고 해도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저 선천성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 자매의 ‘공평하신 하나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몰려옵니다.

왜냐하면 그 공평하심 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도 우리 존재 이유를 찾아볼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인생사에서 하나님께서 공평하신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 조차도 체감할 수 없는 존재는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선각자들이 지닌 특징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본 자들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공평이라고 정의합니까.

내가 잘 될 때입니까.

예수님의 포도원 일꾼의 일당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공평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공평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만이 공평하고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아우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잠잠히 찬양하는 날 되길 기원해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외침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무슨 찬양이 있었겠습니까.

무엇에 대한 회개가 있었겠습니까.

무엇에 대한 감사가 충만했겠습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함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순절 그 성령 강림 이후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그 성령강림이 체험 되어지길 기원합니다.

령강림이 체험 되어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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