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신뢰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신뢰


2023년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신뢰]라는 단어를 목상 하고 싶어집니다.

우리의 신뢰는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에 대한 신뢰를 우리는 모두 갖고 있습니까.

우리 거의 모두에게는 그 신뢰를 잃어버린 경험이 유하지 않습니까.


어떤 유명 연예인의 이미지의 좋고 나쁨은 무엇에 의해 평가됩니까.

청순한 이미지만을 그려온 남녀 배우의 실제 불륜이나 마약 복용 등을 목격하고 실망하는 경우에 대한 경험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버림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뛰어난 성악가로 명성을 떨치며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찬사를 받던 자도 개인적 관계에서 실망하게 되면 그 성악가는 이제 그냥 소리를 잘 내는 악기 정도에 머물기 시작합니다. 

아! 그리고 그 소리에서조차 흠결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인품이나 인격은 무엇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입니까.

그 인격이 그 운명론처럼 그런 것이라면 참 재미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과연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정도로 빚으셨겠습니까.


무한 가능성의 성품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권능이 그 정도를 못하시겠습니까.

바닥난 인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타락한 인격일 수 있음은 또한 비상할 가능성도 갖고 있음이라 여겨지지 않습니까.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평양 대부흥의 기폭제가 된 길선주 장로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먼 길 떠나면서 자신의 처자를 위하여 맡겨두었던 전답을 자신이 착복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신뢰받는 장로 친구였지만 맡긴 것을 친구의 처자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그 친구 처자의 어려움을 외면하면서도 자책 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성령 하나님의 인재를 힘입어 많은 성도 앞에서 자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자복함이 흐름을 일으켜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이룬 것이 평양 대부흥입니다.

그리하여 그 기생과 술집이 즐비하던 도시가 성시(GLORY CITY)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또 우리는 잘 아는 바보 새 함석헌옹의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는 시(詩)도 떠오릅니다.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정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는 구절이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신뢰는 깨어져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배신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신뢰한 만큼 커지는 것이 배신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배신감이 이전의 신뢰함보다 더 큰 무게로 다가올 수 있다고 누군가 얘기해주지 않습니까.


깨어진 신뢰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품었던 신뢰는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모두 그 당시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거나 강론을 들으며 품게 되는 그러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저 뵈레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으로 받아들였다면 비록 마음으로 그런 결단을 하더라도 입 밖으로 그렇게 빨리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며, 찬양을 드리며 품게 되는 결단들을 기록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보게 된다면 우리의 실상은 저들과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과연 아버지 하나님과 어떤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불공평 관계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신문지상에는 연일 불공평한 노사관계를 논평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상하관계의 부당한 처사를 연일 갑질로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기복의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회개하면 무조건 용서해줘야만 하는 도깨비 같은 존재로 정의하는 우리인 것 같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하나님은 안계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의 성지 갈대가 우르땅에서 택하신 아브람에게도 험악한 인생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에게도 마흔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고 후 11:24,25)이나 겪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누가 말한 것처럼 바보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타자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은 이상하게도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외면을 시도하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창 밖에 보이는 광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밤새 내린 눈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칠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온통 세상을 사랑의 모습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그 눈 속에 갇힌 수많은 고통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신뢰는 어디에서만 가능합니까.


가지들이 눈의 무게를 견디면서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 눈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할 일이라고 여겨지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 견딤이 기쁨이라면 그것은 은혜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어렵습니다만 모든 신뢰는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다면 푸름이 보장되지만, 그 눈의 무게에 지게 된다면 푸름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푸름을 체험할 수 있음은 오직 은혜임입니다.

우리의 신뢰는 나무에 붙어 있는 힘의 근간이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능력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없는 가지는 가지일 수 없음입니다.

요한복음 15:5 KRC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4140b7a983a7b733cb493f1c845feff6_1678776329_7512.jpg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