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68주년 현충일을 맞이하면서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68주년 현충일을 맞이하면서

현충일을 맞이하면서 갚을 길 없는 은혜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우리에게 은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까.

우리는 위로 받기에는 갈급한 자이면서도 은혜 갚기에는 인색하다는 생각에 공감되지 않습니까. 꽃은 필 때가 있고 질 때도 있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필 때는 좋아하고 질 때는 싫어합니다.


당연한 것에도 우리는 좋고 싫음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매사에 좋고 싫음이 분명하면서도 단지 은혜 갚음에만 느긋한 우리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금년에도 한국에서는 제68주년 현충일 행사가 엄숙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참전 용사와 유족들 그리고 대통령과 각 기관 대표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과연 전쟁은 왜 일어났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전사자들은 과연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가 과연 전쟁을 시작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입니까.

일반 국민에게는 병역의 의무만 있고 전쟁 거부권은 없다는 그것이 과연 인권의 존중이 되겠습니까.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은 전혀 반대 의미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이없는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을 볼 때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음입니다.


우리는 전장에서 못다 핀 꽃으로 그냥 시들어버린 그 수많은 호국영령을 되새길 때는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우리의 일상은 우리를 그냥 거기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함임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일상에서 우리는 어떤 길이 바른길인지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안식일을 허락하셨는지를 돌아보며 놀랄 따름입니다.


포탄이 떨어지고 총칼을 들이대며 싸우는 전장만 전쟁터가 아니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전장을 체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 모두가 자신만의 유익을 쫓아가며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전쟁에만 전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에도 그보다 더 탁월한 훈련과 전략적 사고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존 전략은 무엇입니까.

뱀 같은 간교함입니까.

성실, 정직, 근면입니까.


우리의 성실, 정직, 근면은 과연 그 간교함을 이길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전장에서 우리의 정직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겨집니까.

전략이라는 것이 어쩌면 속임수라고 해석될 수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또 한편으로는 실력과 담력이 전략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연단 하는 것이 참 승리의 전략일 수만 있다면 세상은 공정하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는 꼭 그렇게 돼지만은 않는다는 데 그 특성이 있는 것 같음을 느끼게 됩니다. 열심히만 하는 그 길이 꼭 바른길이 아닐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의 사랑만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정신적 질고가 우울증이 된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얘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을 잊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승리하는 것입니까.


패배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까.

과연 영영한 승리는 존재합니까.

회복 없는 패배의 확률은 어느 정도인지 누가 가늠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승리와 성도의 이김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성도의 이김은 세상적 승리를 물리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너무 외람됨입니까.

외람됨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일반적으로 분수에 지나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이김은 세상적 분수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는 어리석은 모양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판단하실 수 있는 권능은 오직 지혜의 근본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적 우울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감동과 역사하심이라고 하면 너무 스스로에 대해 무책임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임을 외면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세상적 우울을 스스로 이겨낸다는 것은 영적 교만이라고 정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수많은 전역 병사들의 아픔을 누가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Home Depot Parking Lot에 가보면 그 복잡한 와중에도 늘 비어 있는 Veteran Only라는 Sign을 쉽게 보게 됩니다.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면서 외면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그대들의 헌신 덕택에 우리가 이렇게 평화를 누린다는 감사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아직은 이 미국 땅에 저 청교도의 정신이 있다는 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헌신이 헌신으로 정당한 대우 받을 수 없는 나라가 공정사회일 수 없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현충일은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사망이 없는 하늘에서 현충일은 눈물 흘리는 슬픈 날이 아니라 축제의 날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들이 살아서 뜨거운 칭송을 받는 날이겠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그 나라에 입성하는 날이 곧 승리의 날이라 여겨집니다. 세상에서 모든 날이 영적 전투의 날이겠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일상이 모든 사건과 상황은 영적인 의미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성도의 실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충일을 맞이하여 한국전쟁 전사자를 포함한 희생자 수의 정확한 통계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추정치밖에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것은 우리 중 어느 한 가정도 그때의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하보다 귀하다는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덧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닥칠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로 각성하게 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허락된 새 아침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허락받은 하루의 시작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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