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남을 위한 삶(2)

전문가 칼럼

[정병국칼럼] 남을 위한 삶(2)

<지난 호에 이어>

고 장로님은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셨고, 자신은 늘 옷 세 벌과 신발 두 켤레로 한 세상을 사셨다. 친구네 집에서 옷이나 신발을 사 드리려고 하면 막무가내로 돈으로 달라고 하셨다. 당신이 사 입고 사 신겠다고 하시고는 그 돈을 받아서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로 쓰셨다.  


고 한경직 목사님도 장례식장에서 고 장로님을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인이자 장로로 소개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분이 그렇게 훌륭한 분임을 알지 못했다. 그분은 가셨지만 그분이 씨 뿌려 거둔 인물들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각 분야에서 큰 인물로 소문 없이 봉사하고 있다.  


고 장기려 박사는 한국 사회에서 그 이름 정도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분은 1995년 크리스마스 날에 소천했다. 고 장로님의 수제자(?) 혹은 후계자로 늘고 장로님을 따르고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었다. 나는 그 당시 너무 젊었고 그분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가 돌아가신  후 우리나라 기독교계와 의료계에서는 큰 별이 떨어졌다고 했다. 

 

장 박사님은 정말 남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 북한에서 둘째 아들 하나만 데리고 남하하여 죽는 날까지 집 한 칸 없이 살았다. 자신이 세운 복음병원의 조그만 옥탑방이 그의 전 재산(?)이었다.  

돈 없이 입원한 환자를 치료하고 몰래 뒷문으로 내보냈다. 병원비가 없어도 일단 환자를 치료했다. 우선 입원이 필요하면 입원시켰다. 퇴원할 때 돈이 없다고 하면 나중에 돈 벌어서 갚으라고 하면서 내보냈다.  


그의 장례식 때 가슴을 치면서 애도하는 조문객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그분의 향기였다. 그의 묘지에는 이런 편지도 있었다.  생전에 선생님을 한 번도 적이 없지만 존경해 왔습니다. 이렇게 묘지에 와서 인사드립니다.  평생을 의사로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집 한 칸이 없었다. 옥탑방에서도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팔아서 남을 구제했다.  


한번은 몇 달간 밀렸던 의대 강사료를 받아 몽땅 거지에게 주었는데 이 거지가 경찰에 붙잡혔다. 돈의 출처를 추궁하고 장 박사를 대면시켰다. 그분은 자신이 준 돈임을 확인시키고 거지를 풀려나게 했다.  


그분이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는데 상금 전액을 병원에 희사했다. 그분이 이런 상을 탔기에 그분을 존경하는 것일까? 유명한 의학박사이기에 존경하는가? 아니다. 그분은 평생을 타인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베푸는 삶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믿음의 확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제자들의 주선으로 북에 두고 온 아내를 당국의 허락을 받아 중국에서 만날 수 있었으나 사양했다. 이유인즉, "수없이 많은 이산가족이 이 땅에 살고 있는데 나만 홀로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의 글을 신문에서 읽었다. "바깥에 부스럭 소리만 나도 당신인가 하고 창밖을 내다봅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오매불망 아내만을 기다리는 심정을 표현했다. 


그래도 그 아내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떴다. 이제 두 분은 하늘나라에서 만나 영생을 누리면서 살 것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나만을 위한 이기주의가 하늘까지 치솟은 요즘 세상에서 앞에 소개한 두 분은 정말 이 땅에 사는 동안 남을 위해서만 살았다. 이런 분들이 이 세상에 아직도 있기에 세상은 살 만하고 하나님도 유황불을 내리지 않고 더 기다리고 계신다.  


요즘 나는 내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 두 분이 더욱 그리워진다. 나 자신도 이분들처럼 살지 못하고 있기에 더욱 이분들이 크게 보인다.  '자신이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성실함, 어떤 모양으로든지 관계를 및는 이들에게는 변덕스럽지 않은 진실함을 지니고 매일을 살게 해주십시오. 


시련이 닥치더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견뎌 내는 참을성으로 한 번밖에 없는 제 삶의 길을 끝까지 충실하게 걷게 해주십시오."  

어느 시인의 기도를 음미하면서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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