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돈이 제구실을 할 때(2)

전문가 칼럼

[정병국칼럼] 돈이 제구실을 할 때(2)

<지난 호에 이어>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나의 학창시절에 나에게 도움을 준 분이 있었다. 그분은 내 후배의 어머니였고, 나는 그 집에서 그집 딸(후배의 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별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도 아니었는데 이 아주머니는 늘 남을 도우면서 살았다. 


그 당시 명동 뒷골목에서 미제물건을 팔면서 달러 환전상을 하던 아주머니는 얼마 후 그것을 집어치우고 음악감상실 겸 다방을 경영했다. 아주머니는 어느 교회 권사님이셨는데 늘 그 집에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도움을 청하거나 밥을 얻어먹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목조건물 2층에 방 2개를 얻어서 사는 집이라서 몹시 시끄러웠다. 


대부분이 이북 사람(주로 여자)들이었는데 얼마나 목소리들이 크고 시끄러운지 공부를 가르칠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그 집에서 며칠 동안 먹고 자기도 했다. 그래도 주인아 주머니는 눈살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고, 어쩌다 내가 불평을 하거나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 가르치겠노라고 하면 조금만 참으라고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한번은 등록금이 모자라서 내가 안달을 하며 속으로 격정하고 있는데, 학교에 벌써 등록금을 냈으니 격정 말라면서 내게 영수증을 내주었다. 얼마 후 돈을 장만하여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드렸더니 받지 않았다. 


"나에게 줄 돈(갚을 돈)을 꼭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 지금 당장 주라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돈벌이를 하여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하리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아주머니는 그 당시 많은 고학생들의 등록금을 대주었다. 그중에 더러는 지금 큰 부자가 된 사람도 있고 출세한 사람도 있다. 


5년 전에 그분이 암으로 돌아가실 무렵 나는 몹시 바빴지만 일부러 한국에 나갔다. 풍채 좋고 아름답던 그 착한 아주머니가 뼈와 가죽만 남은 채 말씀도 못하시고 입술만 조금씩 움직였다. 나는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그 가냘픈 손을 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이렇게 착한 분을 꼭 이런 식으로 데려가셔 야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후 10일 만에 세상을 뜨셨는데 많은 조객이 오열했고, 그 조객들 속에는 나처럼 그분에게 빚을 못 갚은 사람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그분에게 진 빚을 누구에게라도 꼭 갚아야만 나중에 그분을 만나서 할 말이 있고 볼 낮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분 아들(내 후배)은 미국에서 대학원을 나와 지금은 컴퓨터 제조회사에 근무하며, 내가 가르쳤던 딸은 역시 최고 학부(이화여대와 연세대 대학원)를 나와 어느 양가집으로 시집가서 잘살고 있다. 이제야 그분의 선행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미 이민으로 1960년대 초에 브라질에 가서 갖은 고생 끝에 큰 부자가 된 선배 한 분이 10여 년 전에 LA에 왔다. 그는 한국에서 남미로 이민 갈 때 300불을 움켜쥐고 갔다. 과일 행상, 날품팔이, 농장 노동자 등을 거쳐 마침내 큰 농장주가 되었지만 그의 청춘은 이미 지나갔고, 60을 바라보는 반백의 로맨스 그레이가 되었다. 


그가 LA로 이주한 후 한 젊은 부부를 만났는데 이들 부부는 마땅한 직업이 없었다. 이들 부부에게 이 선배는 앞으로 5년간 그의 농장에서 나오는 토마토, 양파 등 채소를 최상품으로 골라 외상으로 주되 5년 후에 갚도록 했다. 


젊은 부부는 우선 외상으로 최상품의 과일과 야채를 가져다가 다른 가게보다 싸게 팔 수 있었고, 얼마 안 되어 행상에서 의젓한 야채 과일가게로 발전되었다. 그들 부부는 3년 만에 이자와 함께 원금 외상값을 갚으려고 선물도 하나 마련해 가지고 선배를 찾아갔다. 


이 선배는 옛날 자기에게 도움을 주었던 할아버지처럼 "이 외상값을 가지고 가서 빚을 꼭 갚을 만한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 은혜나 빚을 갚을 때 반드시 은혜를 입은 사람이나 빚을진 사람에게 갚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토록 오래, 즉 빚을 갚을 때까지 이 세상에 살지 못한다. 


그래서 물이 아래로 흐르듯 빚은 꼭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갚게 되는 것이다. 

부모에게 진 빚, 형제에게 진 빚, 또 좋은 이웃들로부터 진 빚을 우리는 어떻게 갚을 것인지 생각해 보자. 아무리 현재의 자기 자신이 잘나고 부자라도 반드시 누구에겐가 빚을 지고 있다면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든지 갚아야만 그분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주홍보다 더 붉은 죄, 알게 모르게 매일 범하는 과오를 그 분께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런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사해 주신 그 빚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나에게 진 빚을 내가 받지 않고 어느 필요한 사람에게 감도 록할 때, 나에게 덕을 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은혜를 갚도록 할 때 우리는 아주 작게나마 우리 자신이 진 빚을 갚는 것이다. 


재물이나 돈은 쓰기에 따라서 우리의 삶에 행복의 필요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 충분조건이 되기는 어렵다. 인간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 돈의 명령에 움직일 때 비극적이 고 비참한 삶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돈의 주인이 되어 영리한 판단 하에 이것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우리 삶에 가장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후자의 경우를 갈망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전자의 경우를 더 많이 범하고 있다. 복권 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사 람들의 가정파탄이나 많은 재산 상속으로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살인까지 하는 경우가 바로 전자의 경우이다. 차라리 벼락부자가 되지 않았다면 평범한 삶 속에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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