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칼럼]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탈북신학생 간증1)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신학대학교 대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에스겔(가명)입니다. 저는 대전****교회 사랑부(**장애인부서)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1962년에 **에서 태어났지만 추방되는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 **라는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곳에서 처녀 시절까지 보냈습니다.
학교 다니는 기간에는 늘 반 학생들의 학습을 담당하는 임원으로, 학교 예술선동대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생일과 년 중 국가 명절을 맞이하여 축하공연을 다니면서 김부자를 찬양하였습니다. 아가씨 시절에도 역시 탄광 예술선전대원으로, 직장의 선동원으로 활동하면서 김부자를 찬양하면서 열심히 생활하였습니다.
24살이 되던 해, 좋은 남편을 만나 시집을 와서 아들과 딸을 낳고 나름 밥술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북한의 어려운 삶 속에서는 저에게 있어서 남편은 마음의 기둥이었고, 마음의 의지였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제가 40살이 되던 해, 저의 가정에는 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구역병원 원장 선생님은 의뢰서를 떼주시면서 빨리 큰 병원에 가서 확진을 받아오라고 하였습니다. 평화롭던 우리 가정은 그때부터 비상이 걸렸습니다.
증명서를 떼고 도립병원으로 가려고 하니까 기차가 없었습니다. 남동생을 역전에 주둔시켜 수시로 차 시간을 알아봤지만 역 안내에서는 기차가 어디에 정착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7일 만에야 기차가 들어왔는데 어디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삽시간에 플랫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남편 회사 청년들이 철길에 있는 자갈을 손에 들고 위협하여 사람들을 제압하고 기차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기차에 오르고 보니 기차 안 역시 알곡 장사하는 사람들과 장사 짐으로 발을 옮겨놓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승무 안전원을 찾아가서 뇌물을 주고 화장실을 차지하려 하였지만 화장실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경찰의 권한으로 사람들을 화장실에서 쫓아내고 한쪽에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함경북도 **군(러시아 인접)의 12월 말, 설 명절을 며칠 앞둔 때여서 화장실도 매우 추웠습니다.
화장실 바닥은 미처 빠지지 못해 얼어붙은 대변으로 작은 산이 형성되어 있었고, 소변이 얼어붙어서 강판을 이루고 있어 맑은 정신에는 숨쉬기도 어려웠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감사한 자리였습니다. 남편이 통증을 호소할 때마다 자리가 협소하여 엉덩이에 놓아야 하는 모르핀 주사를 어깨에 주사하며 한국의 거리로 본다면 대전에서 서울을 가는 것과 같은 거리를 이틀 반이 걸려서야 도착하였습니다.
도립병원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초음파 기계가 있는 병원들마다 “정전이 되었다, 기계가 고장이 났다, 의사 선생님이 사회동원을 나가서” 초음파 한번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들었습니다. 초음파 하기 위하여 5번째로 찾아간 것이 **병원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다리를 붙잡고 꼭 초음파를 해달라고 애걸하고 제일 비싼 담배를 뇌물로 드리고 초음파를 하였는데 “간암”을 “간경변”이라는 오진을 내렸습니다.
기계가 오래되어서 낡았고 병원에 들어오는 전기가 충분한 전압이 다 들어오지 못하여 오진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간암을 간경변 치료를 하게 되어 우리 남편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셨습니다.
너무나 한심한 철도 형편과 도립병원의 허술함을 보면서도 그래도 인민들의 행복을 위하여 밤낮으로 일하시는 장군님의 노고를 생각하며 마음에 위안을 받았던 생각이 납니다. 남편은 두 자식(13세의 아들과 9세의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지금도 쭉 뻗은 도로를 타고 끝없이 달려가고 달려오는 많은 자동차들을 볼 때와 현대적인 의료 장비를 갖춘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오늘도 신속한 이동이 불가능하고 병원의 의료설비가 온전히 갖추어지지 못하여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보지 못하고 힘없이 죽어가고 있을 북한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남편이 남기고 간 자식들에게 아버지 없는 설움을 주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너무 일하여 손톱 자랄 새가 없었고 돈이 되는 일은 다 하였습니다. 술을 뽑고 두부를 만들고, 가축들을 키우고, 땔 나무를 해오고, 농사를 지으며 쉴새 없이 일했지만, 옥수수밥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 없는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자, 도둑들이 휘파람을 불며, 안심하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가축들과 물건을 훔쳐 갔습니다.
집을 지키고 있으면 밭의 곡식을 훔쳐 가고 밭을 지키고 있으면 집의 물건들과 가축들을 훔쳐 갔습니다. 혼자 살아온 10년 기간 제일 부러웠던 것은, 먹을 것이 없는 집들이지만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 가정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을걷이할 때 남편들이 손 달구지를 씽씽 끌고 지나갈 때면 내 팔자를 한탄하며 퍼질러 앉아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하며 한바탕 울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살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요만큼이라도 살게 해준 나라에 고맙게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