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나칼럼] 김치가 이겼다(1)

전문가 칼럼

[레지나칼럼] 김치가 이겼다(1)

정말 오래전 이야기이다.

아이들도 다 장성해서 다 자립하고 결혼해서 독립하고 결혼을 하고 이제는 손자 손녀가 찾아오고 나의 머리 색깔도 검은색보다는 은빛이 더 많다. 아이들이 자랄 때 사진을 정리해서 각 가정으로 전해주려고 사진을 한장 한장 정리하려니 여러 가지 추억의 생각들이 많다.

큰아이가 5살 둘째가 3살 때였다.


위스콘신에서도 작은마을 써링이라는 곳에서 남편의 일로 발령받아서 살 때 이야기이다.

인구는 3000명 정도인 작은마을로 이곳에는 주로 스칸디나비아 후예들과 독일 계통의 사람들의 사람들이 마을 사람구성으로 사람들이 무척이나 친절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하며 씩씩했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

미국을 배울 수 있었다.


3000명 중에서 우리 가족이 유일한 동양사람이고 또 유일한 한국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 중에는 6.25가 나던 해에 한국에 있었던 한국 참전용사들이 있어서 한국을 기억한다면 전쟁통에 피란민들이 배고파하는 모습과 집 잃은 고아들의 모습 등이었다.


우리 가족이 이사 간 집은 이 동네에서도 제일로 크고 좋은 집으로 방이 9개에다가 뒤뜰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Brook)이 있었는데 이 집은 이 동네에서도 제일 부자였던 사람이 살던 집인데 감사하게도 우리 가족이 들어가 살 수가 있게 되었었다. 집이 얼마나 큰지 집안에서 아이들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왔다 갔다 했었다.


밤이면 비버들이 그 긴 이빨로 사각사각 나무를 깎아서 댐을 만드는 물속에 빠뜨리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 가족이 거실에 앉아있으면 산속에 살던 사슴들이 우리집 뜰 안으로 놀러 와 뒷마당에 풍성하게 자란 크랜베리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곤 하였고, 우리 가족은 사슴이 놀라서 도망가버릴까 봐 집 안에서도 발꿈치를 들고 다녔다. 집의 구조가 방이 9개가 길게 있었는데 모든 방문과 창문이 통유리로 되어있어서 뒷마당 전경이 다 보였었는데, 아이들은 뒤뜰에 사슴이 와 있으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엄마! 


쉿 조용히 해야 해 지금 사슴이 밥 먹고 있어) 때로는 집 뒷마당에 길게 흐르는 브룩(시냇물)에 눈에 띄는 것은 수달 가족들이 배를 하늘로 향해 수영을 하면서 은빛 물고기를 잡아서 입에 물고 있다가 하늘로 올렸다 던졌다 하면서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물고기를 토스를 하며 놀기도 하였는데, 수달이 물고기를 하늘로 던져지면 햇빛에 반사된 물고기의 은빛이 햇살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면서 물고기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이들과 나는 잡힌 물고기가 안 되어서 안타까워 했지만 물고기는 벌써 수달에게 맛있는 식사가 되었었다.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동네에서 키우는 사슴원이 있었는데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사슴과 태어난 지 며칠 안 되는 예쁜 아기 밤비들이 있어서 우리 아이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이곳으로 뛰어가 옆에 있는 잡풀을 뜯어다가 사슴 우리 밖에서 사슴이 이리 오렴! 불러보며 가까이 와 풀을 받아먹는 사슴을 너무나 신기하게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어느 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시내로 샤핑을 하고 들어오는 집 길목에 태어난 지 얼마안 된 예쁜 밤비가 어쩐 일인지 사슴 우리 밖으로 나와 있어서 마침 어스름한 저녁 시간이라 사슴 우리를 관리하는 이들과 연락을 할 수가 없어서 아기 밤비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이들과 함께 둘째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security blanket(애착 이불)으로 감싸주며 온 식구가 밤에 잠을 못 자고 거실 한구석 박스에 있는 밤비를 보살폈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사슴 관리인에게 연락하니 당장 사슴을 데리러 온단다.

아이들은 밤새 함께 한 밤비를 더 데리고 있고 싶어 했기에 밤비를 사슴원에 보내려니까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했지만, “나래와 송이가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있을까? 밤비도 엄마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거야”라고 설명을 해주니 눈물을 뚝 그치고 자기들이 밤비를 안고서 사슴 우리까지 가겠다고 해서 자그마한 밤비를 두 아이가 함께 안고 우리까지 갔다.


사슴 우리는 우리 집에서 100미터 거리도 되지 않아서 아이들은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사슴 우리로 쪼르르 달려가서 아침 인사를 하고 오고는 했다. 우리 가족이 처음 교회에 간 날 아마도 이 교회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 동네 사람들은 다 모인듯하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동양사람이라고는 전혀 구경하기 힘든 동네에 한국 사람인 우리 가족이 이사를 오자 입소문을 타고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던 모든 이들이 교회에 온 것 같았다. 예배당은 자리를 찾을 수가 없게 사람들로 들어차서 정말 앉을 틈조차 없었고, 사람들은 예배보다는 우리 가족을 살펴보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듯했다. 


우리 가족이 매주 예배를 마치면 교회의 elder(장로님인 케니 올슨과 그의 부인이 우리 가족을 초청하여 교회 옆에 있는 동네 식당에서 늘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시카고 시내에 살면서 학교엘 다니며 한국 음식에 익숙해졌던 우리 가족에게는 이 식당의 모든 음식이 직접 밭에서 재배한 신선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해시 브라운(감자 채 썰어 팬케익처럼 구워낸 것), 집에서 직접 만든 햄과 방목하여 기른 닭이 낳은 계란 그리고 신선한 우유까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써링으로 이사 간 지 6개월 만에 우리 가족은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모든 옷을 바꾸어야 했다.

우리 아이들은 케니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일요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아무리 집에서 내가 같은 음식을 해주어도 아이들은 동네 레스토랑에서 자기들이 모든 이목의 중심이 되어 사랑받으며 먹는 음식과 뭐든지 듬뿍듬뿍 넣은 (버터) 음식에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음식은 엄마의 제제 없이 먹는다는 행복감에 엄마 일요일 내일 또 와요? 묻곤 했다.


(독일 계통의) 케니 장로님이 주일예배를 마치고 늘 우리 가족에게 점심을 대접해주고 나서는 그 동네에 있는 유일한 아이스크림 가게로 우리 가족을 데리고 가서는 아이들의 손에 잡기도 힘든 큰 아이스크림콘을 사주어서 아이들은 케니 할아버지를 너무나 좋아했었다.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서 독일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치킨과 소꼬리 그리고 각종 야채를 커다란 솥에다 넣고 장작불로 함께 푹 끓여서 먹는 치킨 부야도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가끔 같은 동네 목장을 하는 사람들이 갖다주는 우유를 가지고 다양한 치즈를 만들어서 먹을 줄도 알게 되었고, 독일사람들이 즐겨 먹는 potato pancake을 즐겨 먹게 되었으며, 누구보다도 맛있게 sour cruet(독일식 김치)을 만들 줄 알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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