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김의 감성과 지성] 겨울날의 애상(哀想)

전문가 칼럼

[엘리엇 김의 감성과 지성] 겨울날의 애상(哀想)

“운명 앞에서

우리 모두는 겸허해질 수 있니?

썩은 고목나무 가지 끝에서 눈 터 오르는

작디작은 새싹의 봉우리에서부터

저 차디찬 하늘을 나르는

이름 모를 한 마리 새에 이르기까지…


비에 젖은 가로등이 나를 외면하는 듯한

어둠 속의 고속길을 달리며

나는 너의 죽음을 이렇게 괴로워한다.

그 길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일지언정…”


수십 년 전 1980년대에 이맘때, 절친의 영전에 쓴 나의 추모시를 다시 찾아보았다.

이제 또 겨울이다. 자연의 순환은 우리가 싫어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떨어지는 낙엽을 자세히 보았는가? 잎새가 그 수명을 다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져 간 바로 그 자리엔 눈에 겨우 보일 듯 말 듯한 새싹의 티눈 같은 봉우리가 낙엽을 밀어내며 나오고 있다. 


문득 자연의 순환과 그의 섭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우리의 운명도 바로 저와 꼭 같지 않을까? 우리도 언젠가는 삶의 소명을 다하고 바싹 말라버린 잎새가 되어 낙엽처럼 떨어지면 내가 매달려 있던 그 자리엔 새싹의 봉우리가 눈 터 나온다. 아니, 그 봉우리가 나를 밀어내고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지. 나의 후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인간 역시 자연의 극히 일부분 중에 하나이니까…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어느 겨울방학 때의 episode다.

저녁에 목욕을 하고 나니 어머니께서 신문지를 깔고 나의 손톱을 깍아 주셨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내가 어머니께 이런 걸 물었다. “엄마,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자 잠시 후, 어머니는 신문지 위에 떨어져 있는 나의 손톱들을 집어 보여 주시면서 나에게 이렇게 얘기를 해 주셨다. 


“이 손톱들처럼 나한테서 일단 떨어져 나가 버리면 이걸 마당에 버리든 쓰레기통에 버리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 아쉬워할 것도 아까워할 것도 없지? 네가 지금 이 손톱들을 보듯이,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죽은 몸을 꼭 이 손톱들처럼 보게 될 거야. 네 몸뿐만이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장난감들도 사탕도 과자들도 놀이터도 친구들도 이 손톱들처럼 다 마찬가지야.”


어머니의 이 말씀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확실하게 남아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선명한 concept이다. 언젠가 후세의 학자들은 이 concept를 양자역학의 차원이론으로 더욱 선명히 규명해 줄 수 있을까? 우리 집 아들 녀석이 자라나며 철이 들자 미리 맨정신에 유언도 할 겸 해서 이런 말을 가끔씩 한 적이 있다. “혹시 아빠가 엄마보다 먼저 가게 되면,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깨끗이 화장하여 아빠의 몸을 자연으로 보내 달라. 


어차피 다 태워 버릴 거 관도 필요 없을 것이고 가족들만 지켜볼 것이니 남들에게 흉하게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장례식 같은 의례도 산자들의 의미이다. 비싼 돈 들여 가며 그런 거 하지 마라. 차라리 그 돈은 아껴 두었다가 언젠가 네가 보기에 정말 딱한 처지에 있는 어린아이나 사람에게 전해 주어라. ‘우리 아빠 장례비, 관값 아꼈다가 주는 돈’이란 소리는 물론 하지 말고. 돈 받고도 기분 더러워진다. 


그것이 나를 기념하는 것. 나의 죽음을 친지들에게라도 먼저 알리지 마라. 언젠가 그들이 연락 오면 그때 알려 드려라. 나의 죽음으로 인해 수고하는 건 직계가족으로 족하다. 그것은 남은 가족으로서 산자의 의무이니까. 한 줌의 재가 된 나의 몸은 너나 엄마에겐 아빠로서의 기념품 souvenir에 불과하다. 


그건 그때 네가 알아서 편한 대로 처리할 일이지만 지금 내 마음 같아선 나의 잿가루는 고급스럽고 비싸게 보이는 보석함이나 도자기 같은 데다 담아 두지 말고 작은 나무통에 담아 집안 한구석, 엄마가 좋아할 만한 곳에 놔두었다가 언젠가 엄마도 죽게 되면 그때 네가 자주 다니며 편하고 좋아하는 장소에 묻든지 뿌리든지 네 좋을 대로 하면 될 거야. 


괜히 고급스럽고 비싼 통에 담아 두었는데 집안에 무식한 도둑놈이 들어와서 그걸 보석함인 줄 알고 훔쳐 갔다는 뉴스가 종종 나오더라.”인간은 슬픈 존재이다. 인간은 이렇게 삶보다는 죽음에 더 익숙해져 있다. 바로 이것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철학적 사유의 시작이다. 그래서 원시철학은 자연환경과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와 타인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인간만이 갖는 니힐리즘이란 감성의 renovation이 바로 인간에 대한 긍정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도 색계에서 무색계의 시작의 첫 단계가 허무이다. 허무에 대한 깊은 인식이 바로 진실한 실존철학적 사유의 첫걸음이다. 그를 통해 타인을 보고 그들을 배려함으로 의식을 무의식으로 융해시키는 것이다. 


아무런 목표가 없다는 쇼펜하우어적 사유는 그래서 좋다. 욕구와 그에 대한 반의식, 그것이 인간 행동양식의 거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무지 허무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엄청 어렵다. 허무를 극복하고 이기적인 욕망이 아닌 존재에 대한 본질적 인식, 그래야만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진정 사랑할 때, 타인의 욕망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의식과 무의식, 두 개로 인지하는 것, 그것도 자기 성찰에 아주 정통한 방법이다. 하기야 ‘나’라는 것에게도 종류가 많다. 대타적인 나, 즉자적인 나, 반즉자적인 나, 무의식적 상징으로서의 나, 등등… 하여튼 나라는 것 하나 구별하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의 끝자락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

겨울만큼 죽음에 더 익숙한 계절도 없으리라. 인간은 가을이 깊어져 겨울로 접어들면 본능적으로 고독과 허무를 느끼며 정서적으로 다른 계절에 비해 더 우울해진다. 음악을 들어도 그렇다. 가을을 주제로 한 음악은 타 계절의 음악에 비해 minor, 단조음의 성향이 더 많다. 


노래 음악도 가을과 겨울에 만남을 주제로 한 음악보다는 떠남과 헤어짐을 주제로 한 음악이 대부분이다. 열대와 아열대 지역을 제외한 계절을 갖는 지역에서 살아온 인류는 원시시대 때부터 수만 년, 수십만 년 동안 가을이 깊어져 겨울이 오면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으로 가까운 이들이 더 많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 왔다. 


겨울이 다가옴은 곧 죽음이 가까워져 왔다는 불안과 공포의 인식이 인간들의 기억 회로 속에 유전인자화 되어 오늘날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화인류학과 진화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생각이 유전인자에 의해 지배된다. 그 유전인자는 환경에 의해 확률적으로 결정된 것이고 그 환경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는 거의 정설과 다름없다.

이것이 이 겨울날 나의 슬픈 생각이다.


06fda99273a65add3e22ee5433dfe3ef_1764929280_1159.jpg


06fda99273a65add3e22ee5433dfe3ef_1764929281_3156.jpg


06fda99273a65add3e22ee5433dfe3ef_1764929283_0799.jpg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