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칼럼] 블루제이 이야기(4) 그늘진 인연

전문가 칼럼

[김수영칼럼] 블루제이 이야기(4) 그늘진 인연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시애틀 한인 부동산 업계에는 이른바 ‘트로이카 시대’가 열렸다. 캘리포니아에서 올라온 부동산 중개인들이 잇따라 회사를 열면서 중개인 영입은 물론 고객 유치 경쟁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대형 미국인들만 수백 명 있는 부동산 회사에서 탑 프로듀서로 많은 실무를 익힌 뒤, 벨뷰 다운타운에 자체 부동산 회사를 설립해 Designated Broker인 책임대표로 Helix International Inc.를 운영하고 있었다. 월급쟁이 여사무원에게 급작한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한진그룹에 근무하며 출퇴근할 때 타던 현대 엑셀은 서북미에 새롭게 등장한 신형 소나타로 바뀌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막 등장한 Lexus LS 400을 타고 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전문인이 되었고, 명성 있는 건축회사에서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인 1,000달러짜리 노드스트롬 상품권과 꽃다발을 사무실로 보내오기도 했다. 그런 황금기가 있었다.


지금의 벨뷰 Factoria 뒤편, 우편번호 98006 지역에는 Country Wood 등을 비롯한 건축회사들이 수백 채의 신규 주택을 개발하고 있었다. 당시 25만 달러 안팎이던 주택을 한 달에 열 채 이상 계약하던 때도 있었다. 일 년 내에 그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아졌었다. 지금은 그 집들은 200만 달러에 이르는 집들이 되어 있는 지역이다.


내 사무실에는 워싱턴대학교 출신 3총사를 비롯해 목사, 엔지니어, 기자 출신, 한국에서 의사로 일했던 분까지 다양한 경력을 가진 중개사들이 함께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40대 중년 남성들이었다. 앞배가 불쑥 나온 분도 있었고, 반백의 흰머리를 한 옛 야구선수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막 30대로 들어선 키 작은 여사장이었다. 그래도 모두 내 지침을 잘 따라주던 반듯한 신사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40대의 인상 좋은 부부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Federal Way 인근에서 사업체를 찾던 중 우리 회사의 리스팅 하나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첫 방문이었다. 두 번 찾아올 것도 없이 그날 바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그 부부는 가까운 지역에 주택도 마련했고, 자녀들은 많은 학부모들이 선호하던 Newport High School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남쪽 지역에 자리 잡은 몇몇 한인 부동산 회사들의 경쟁이 갈수록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상대 회사를 겨냥한 괴문서가 언론과 개인들에게 돌기 시작했고, 서로를 국세청에 고발해 감사를 받게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는 지금처럼 모든 것이 이메일로 오가던 시절도 아니었다. 손으로 타이핑한 괴문서가 우편으로 날아왔다. 소인은 올림피아, 켄트 등 매번 다른 곳에서 찍혀 있었다.

처음에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괴문서에 내 이름까지 등장했다. 여성으로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모욕적인 욕설까지 담겨 있었다.


나는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우편물과 타자기의 활자체 등을 단서로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 배후를 둘러싼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시애틀의 주요 TV 뉴스에서 한인 사회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보도되었다. 괴문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 부동산 중개인이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던 남성의 공격을 받아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였다.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오래전 내 사무실을 찾아왔던 그 인상 좋은 부부와 이 일이 뜻밖의 실타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부부가 하루 사이 다른 회사의 고객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는, 정작 한 번도 만나본 적조차 없는 나에게까지 원망의 화살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했다.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느새 그 사람에게 ‘미움받는 저주를 받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살다 보면 좋은 인연만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다가오는 인연이 있고, 얼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느새 삶의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인연도 있다.


돌이켜보면 40년 가까운 사회생활 속에서 나는 그런 그늘진 인연들을 적지 않게 만났다. 남의 성공을 편안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 이유 없이 경쟁하고 시기하는 사람,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인연에는 햇빛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늘도 있다.


그리고 그 그늘을 지나온 시간까지도 결국은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무한히 길 것 같았던 세월은 생각보다 짧았다. 사람들은 떠났고, 그토록 무섭고 억울했던 일들도 세월 저편으로 흘러갔다.


이제 나는 가끔 그 시절을 뒤돌아본다. 지우고 싶었던 기억조차 세월이 지나니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아마 그래서 이제야 나는 그 이야기를 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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