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김 컬럼] 정복자 해방자 그리고 영웅 (2부)

전문가 칼럼

[엘리엇 김 컬럼] 정복자 해방자 그리고 영웅 (2부)

도쿄에 도착한 맥아더의 최우선 과제는 단순한 군사 점령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정신적으로 완전히 재구성하려 했다. 그가 겨눈 대상은 일본인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신성한 존재, 바로 히로히토 천황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프로이센 체제를 본떠서 천황의 절대 권위를 확립한 뒤, 천황은 ‘현인신(現人神)’, 즉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신을 직접 신단에서 끌어내릴 작정이었다. 1945년 9월 27일, 그는 천황의 황거를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히로히토를 ‘호출’했다.


미국 대사관 관저에서 역사적인 장면이 사진으로 남았다. 키 180cm가 넘는 맥아더는 노타이에 맨 위의 단추가 열린 군복 셔츠 차림으로 두 손을 허리에 얹어 재면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반면 왜소한 체격의 히로히토는 깍듯한 예의를 갖추고 몸에도 잘 맞지 않는 연미복 예복을 입은 채 정중하고도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옆에 서 있었다. 이 사진은 다음 날 일본 전역 신문의 1면 톱을 장식했고, 일본 국민에게 준 심리적 충격은 원자폭탄에 비견될 정도였다. 


‘정복자’ 앞에 선 ‘신’도 결국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정신적 상징이 무너졌다면, 정치적 권위 역시 짓밟혀야 했다.

당시 일본 총리대신이었던 요시다 시게루가 맥아더를 예방하러 왔을 때, 미군 경비 헌병은 그에게 후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이는 패전국이지만 주권 국가의 내각 수반에게는 극도의 굴욕이었다.


요시다가 분노를 담아 항의하자, 맥아더는 창밖 도쿄만을 유유히 항해하는 미 제7함대의 거대한 전함들을 가리키며 점잖고도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 맞게 표현을 다시 정리해 보시죠.” 이 말은 바로, “다시 한번 말해봐!”의 극히 세련되고도 정제된, 격조를 갖춘 외교적 언어 표현이었다. 개인의 수준과도 마찬가지로, 외교적인 언어 표현은 바로 그 나라의 국격과 수준을 상징하는 것. 요시다는 즉시 주눅이 들어 침묵했다. 


그는 구시대의 모든 규칙이 이미 무효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전범들을 처단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법원은 연합국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의 특별포고령과 동 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로 공포된 극동 국제군사법원 헌장에 따라 1946년 1월 19일에 설치되었고, 5월에 개정되었다. 


도쿄 법정은 1948년에 판결을 내렸는데, 7명이 사형(교수형), 16명이 종신형, 2명이 유기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2명은 판결 전 사망, 1명은 매독에 의한 정신이상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재판이 개정된 법정은 이들 전범들이 자기들의 후배이자 제자들인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훈시하고 교육하던 도쿄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건물 2층 대강당이었다.


사형 집행 방식은 전원 교수형이었다.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는 달리, 맥아더는 현역 군인이라 할지라도 군인들의 명예형인 군복 차림의 총살형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처럼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아주 지옥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 현직 군인들 3명에 대한 총살형을 강력하게 반대해서 전원 교수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또한 교수형 집행 시에도 군복이 아닌 일반 흉악범죄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복을 입혀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독일 뉘른베르크의 국제 군사재판 경우에는 카이텔과 요들이 군인 신분이라 군복 착용을 허용받고(다만 훈장 및 계급장은 강제 탈거되었다.) 교수형을 집행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의 나머지는 원하는 복장(주로 정장)을 입게 하고 형을 집행했다. 


대신 독일에서는 목줄의 길이를 고의로 더 짧게 조절한 요제프 랑 방식(기둥에 그냥 목을 매다는 교수형)으로 최소 10분 이상 질식하며 고통스럽게 처형한 반면, 일본에서는 전범들이 원하는 군복은 입지 못하였으나 그나마 느끼는 고통이 짧은, 교수대에서 몸통이 밑으로 떨어져 질식사하는 long drop 방식으로 처형했다. 


일본 전범의 우두머리 격인 진주만 불법 공격과 태평양 전쟁의 총책임자인 제40대 내각 총리대신 육군대장 도죠 히데끼 역시 현직 군인 신분이라 명예롭게 군복을 입고 총살형으로 처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기각되어 일반 죄수복을 입은 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천적이었던 맥아더의 사인이 되어 있는 사형 집행 명령서 한 장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그도 역시, 구시대의 모든 규칙이 무효가 되었음을 깨달았으리라.


폐허가 된 옛 질서 위에서 맥아더는 또 다른 얼굴, ‘해방자’로 변신했다. 그는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며, 그중에서도 토지 개혁은 핵심이었다. 그는 지주가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1정보(약 2.45에이커)로 제한하고, 초과분은 정부가 헐값에 강제 매입해 무소유 소작농에게 재분배하도록 했다. 단 2년 만에 일본 소작농의 약 90%가 자기 땅을 갖게 되었고, 농업 생산력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사 직전 굶주림의 경계에서 허덕이던 서민들과 하층민들에게 맥아더는 생존의 길을 열어준 ‘구세주’였다.

그는 일본 여성들에게도 전례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참정권과 재산 상속권을 인정함으로써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남존여비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였다.

그가 주도해 제정된 신헌법은 특히 ‘제9조’로 유명하다. 해당 조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한 국제 평화를 진심으로 추구하며, 국가 권력에 의한 전쟁과 무력의 위협 또는 무력 행사를 국제 분쟁 해결 수단으로 영구히 포기한다.”

이 영구 비무장 조항은 일본의 목에 씌워진 무장 해제의 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후 일본이 군비 경쟁을 피하고 모든 자원을 경제 발전에 투입할 수 있게 만든 토대이기도 했다. 이는 훗날 일본의 재도약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물론 이 ‘상왕’의 생활은 극도로 사치스러웠다. 그는 재벌 가문의 호화 관저에 거주하며 미국식으로 개조했고, 침구류까지 모두 미국에서 공수했다. 평범한 일본 시민들이 보리와 밀기울이 섞인 주먹밥을 얻기 위해 줄을 서던 시절, 그의 식탁에는 매일 미국 본토에서 공수된 신선한 스테이크와 채소, 향긋한 커피가 올랐다.


그와 ‘쇼와 시대 제일의 여신’이라 불리던 톱스타 여배우 하라 세츠코와의 염문설도 끊임없이 떠돌았다. 그녀는 자주 맥아더의 관저를 드나들며 각종 공식 행사에 동행했다. 어떤 이는 이것이 구귀족들이 정복자에게 바친 ‘선물’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국가를 위한 여배우 스스로의 희생이라고 말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소문들이 맥아더의 어떤 전략적 결정을 흔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가 천황을 전범으로 처형하지 않고 살려준 것은 사회 안정을 위해 그 권위를 이용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고, 일부 전범을 사면한 것은 친미 정권을 구축하기 위해서였으며, 재벌을 해체한 것은 군국주의의 경제적 기반이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철저하게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계산된 선택이었다.


결국 일본을 사실상 통치하던 이 절대 권력자도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의견이 충돌하면서 몰락했다. 그는 전쟁을 만주에 집결하고 있는 중공군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을 중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한 통의 전보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바로 그 장면, 수백만 명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배웅하는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그들의 눈물 속에는 평화와 인권, 토지와 빵을 가져다준 데 대한 감사가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담겨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군국주의에 병들어 있던 일본에 대해 외과 수술과도 같은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떠났지만, 일본은 이미 그에 의해 영원히 바뀌어 있었다.

그는 정복자 해방자 그리고 영웅이었다.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