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칼럼] "음력설과 정월 보름이면 생각나는 풍물놀이" - 시애틀한인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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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수 칼럼] "음력설과 정월 보름이면 생각나는 풍물놀이" - 시애틀한인문학칼럼

이성수(수필가·서북미문협회원)


내가 어렸을 적에는 양력설은 일본설이고 음력설은 조선설이라고 하여 모두 음력설을 쇠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는 양력설을 쇠고 음력설을 쇠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력설 탄압을 하였다. 


음력설 전에 방앗간에서 떡을 못 하도록 흰 가래떡 뽑는 기계를 빼앗아가고, 술을 못 하게 집집마다 다니며 수색을 하고, 설날 설빔으로 입은 흰옷에 검정 물총을 쏘는 등 악랄하게 탄압을 하였다. 


학교는 음력설날도 정상수업을 하였다. 일찍 일어나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고 떡국을 먹은 후 서둘러 학교를 갔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막아도 조상대대로 내려오면서 전통을 계승하는 한민족의 제일 큰 명절을 막지는 못했다. 다들 숨어서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음력설을 쇠 왔다.


해방이 되고도 정부는 음력설을 쇠는 것은 이중과세(二重過歲)라고 양력설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양력설을 쇠고 새해를 맞이하면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의 혹한이 찾아와 새해 설 기분이 영 나지 않았다. 음력설을 쇠어야 입춘(立春)이 지나 추위가 물러가고 봄 기운이 완연하여 새해 새봄을 실감케 하였다.

 

또 양력설을 신정(新正), 음력설은 구정(舊正)이라 불렀다. 신정을 권장하던 정부도 국민 거의 모두가 음력설을 쇠자 음력설 하루를 <민속(民俗)의 날>이라 하여 휴일로 정하다가 드디어 노태우 대통령 때(1989년) 음력설이 우리 고유의 설로 지정되었고 3일간 공휴일로 정해졌다.

내 고향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풍물놀이 패거리가 있어 설, 정월 보름, 추석이나 동네행사 때 마다 풍물놀이를 해 오고 읍, 면, 도 경연대회에 출전하였다. 


달력을 보면 올해의 음력설이 2월12일이고 3일 동안 붉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다. 사흘이 휴일이다. 


반세기도 더 된 나의 소년 시절의 음력설과 정월 대보름 생각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설 명절과 대보름이 돌아오면 마을이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풍물놀이 패거리들로 고요하던 마을이 시끌벅적 부산한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고요한 마을에 바람처럼 불어온 평화의 축제! 그 멍석 판이 한 마당 펼쳐지면 온 동네가 들뜨고 어수선하였다. 온 마을이 풍악소리에 귀를 모으고 문을 열었다.


마을 축제행사는 설과 대보름 사이에 날짜를 정해 놓고 펼쳐졌다. 


풍물꾼들은 꽹과리, 장구, 북, 징, 태평소 등의 악기를 기본 구성으로 10명쯤 되는데 모두 유니폼을 입었다. 그 시절에는 옷 재료가 귀해서 광목(廣木)으로 만든 바지저고리를 입고 파랗고 빨간 어깨띠를 둘렀다.


그리고 머리엔 붉은 조화 꽃을 단 고깔모자를 쓰고 풍악을 울리며 지신(地神)밟기를 하였다. 교회가 마을에 들어오기 한참 전이다. 사람들은 조상들이 믿어오던 여러 신(神)들을 숭배해 왔다. 우리가 딛고 사는 땅에도 신(神)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지신(地神)이라 했다. 이 지신을 밟아 진정시키고 잘 받들고 위하여야 1년 동안 가족들이 건강하고 풍년이 들고 복을 받는다고 믿어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악의 힘을 빌리고 동네 사람들이 합심하여 밟아야 한다고 여겨 왔다. 

 

농자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상쇠를 따라 먼저 새해에는 복이 쏟아지라고 동네 하나밖에 없는 큰 대동 우물을 찾아가 신나게 풍악을 울리며 굿을 하고 지신을 밟았다.


그리고 곧 집집마다 다니며 바깥마당과 안마당, 뒤 뜰, 외양간, 부엌, 심지어 뒷간에 까지 다니며 열심히 지신밟기를 하였다. 


풍물꾼들은 익살스런 모습으로 꼽추와 각시로 변장하여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지신밟기의 선두에 서서 모범을 보였다. 

 

한 청년은 붉은 치마 노랑 저고리의 여자 한복을 입고, 가슴에 불룩하게 솜을 넣어 풍만한 가슴을 만들고, 엉덩이도 크게 하였다. 그리고 입술엔 루주까지 칠하고, 얼굴엔 구리무(크림)와 분으로 분장을 하고, 눈썹을 그리고, 머리엔 여자 가발까지 쓰고 다녔다.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각시로 보였다. 처음에 웬 미녀인가 깜빡 속은 것은 마을 아주머니들이었다. 


“여자 옷 입은 저이가 집의 신랑 아녀?“

“어제 부터 내 옷을 찾더니..." 


남녀노소 동리 사람들은 깔깔대며 배꼽을 잡고 박장대소하였다. 변장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진짜 처녀 저리가랄 정도였다.


한 집 지신을 밟고 나갈 때 집 주인 아주머니는 곡식을 조금 자루에 넣어 주고 시루떡도 챙겨 주었다. 이 십시일반(十匙一飯)의 현물이 진짜 부조였다.


마을 지신밟기를 다 끝내고 이장 집 넓은 마당으로 이동하여 상쇠가 자진모리 두 장단으로 소리를 메겼다. 온 풍물 꾼과 동네 남자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여 “어허루이! 지신(地神)이시어/ 어허루이 지신이시어” 를 연거푸 외쳤고 사이사이 풍악소리가 흥을 더 했다. 이 합창소리는 슬프고 구성지게 들렸다. 


집터를 닦을 때, 상여를 메고 갈 때도 이런 소리를 질렀는데 그 뜻은 잡귀야 물러가라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소리라고 한다.


지금도 구정과 정월 대보름날이면 고향에서는 풍물놀이와 지신밟기로 명절 행사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 19 때문에 행사를 못하지만 조상 대대로 이어오는 농경사회의 민속 문화를 발전 계승하였으면 한다.

 

나의 손자가 초등학교 풍물반에 가입하여 상쇠가 되었다. 장차 동리 풍물놀이를 리드할 후진이 될 것을 생각하면 대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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