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왜 나를 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왜 나를 택하셨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전에 우리는 모두 헨리 나우엔의 <아담>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책의 내용 보디 그의 삶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톨릭의 사제로서 예일, 노트르담,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자였으나 그 모든 명예를 뒤로하고 캐나다 토론토의 라루시(L’Arche)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 지체 장애인을 섬겼습니다.
그는 참으로 자신이 얼마나 큰 긍휼히 여김을 받은 피조물인지를 자각한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와 동시대에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마저 느끼게 됩니다.
그를 진심으로 아끼는 많은 자가 왜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질타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재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을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득 “기진” 이라면 단어가 떠오릅니다.
어쩌면 그 순간 그는 그 명예로운 <섬김>을 통하여 더 행복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감을 받을 수 없는 섬김>이 헛됨을 자각하게 하신 것 같음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신 것 같음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을 <가이없는 사랑>이라고 정의하는데, 그 말은 우리는 결코 그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몸 둘 바를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우리끼리의 도토리 키재기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때로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딱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듦도 그러한 연유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만큼은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다윗도 바울도 베드로도 그 이상일 수는 없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기까지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어디까지 알게 하시는가가 곧 우리의 한계입니다.
인생 사용 설명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참으로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방법이 정도(正道)라고 주장함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감명 깊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눈물을, 미소를, 폭소를 내기도 합니다만 딱 거기까지라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전에 <평양대부흥 AGAIN 1907>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를 함께 본 우리 성도들은 각자의 심령 속에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그 체험으로 서로 부둥켜안으며 하나 되게 하심을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금방 우리를 깨어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뭉치게도 하시고, 흩으시기도 한다고 여겨집니다.
중요한 것은 흩어졌어도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각자의 하나님 일 수밖에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 위안의 사역은 지적 장애인인 아담의 곁에 매일 변함없이 2시간 정도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정신지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당한 단어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되게 하셨다면 장애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헨리 나 오른쪽엔 은은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옆에 머물면서 자신이 성숙해짐을,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음을 체험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우엔은 아담의 불편함을 채워 죽었겠지만, 아담은 그에게 주님을 체험하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진정으로 섬겼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나 위안의 명성, 지성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없는 것은 세상 적 편견이었습니다.
편견 없이 상대를 볼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당연히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편견 없이 바라보아 줄 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나우엔은 아담을 통해서 만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가톨릭 사제로서 이 땅에 살면서, 억누르는 책임감과 사명감에 사로잡혔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이 그를 사제로 명망 높은 교수로 살도록 몰아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눈에는 그것이 별로 자신과 살라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도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로서의 또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