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칼럼] 한국 4-H운동의 발자취(4) - 시애틀한인로컬칼럼
<지난 호에 이어>
이에 대해 한국 측에서는 연수생의 농장 이탈을 예방하기 위해 연수생을 선발하는 기준을 영어 실력보다 영농 의지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그리고 연수를 끝까지 성실하게 잘 마치고 귀국하면 국가에서 영농자금을 충분히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21일 동안 돌아다니면서 원만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는 달리 매우 홀가분했다. 그것은 낯선 미국 농장에서 고생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우리 연수생들이 뜻밖에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그 동안 서로 이해 부족으로 발생한 문제도 비교적 원만하게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출장을 이렇게 잘 마치고 귀국하니 국내에서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다. 국내의 여러 신문에 KATP 연수생들이 그곳에 눌러앉을 목적으로 연수 받던 농장에서 대거 이탈했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미국으로 보낸 전체 연수생 244명 중에서 무려 48%에 이르는 116명이 농장을 이탈했으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문 보도에 대해 중앙정보부와 청와대가 실무 책임자인 나를 불러 진상 규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우리 민초들에게는 무섭기만 하던 이곳에서 날카로운 심문을 받으면서도 나는 평소에 이 KATP 사업에 대해 지니고 있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조리 있게 진술했다.
나는 이탈한 연수생을 나무라기커녕 칭찬해야 한다는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내가 진술한 논리는 우리 연수생들의 강한 의지를 높이 평가하는 동시, 이탈한 연수생은 장차 미국 땅에서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나타냈다.
사실 우리 연수생들은 4-H회원으로 시골에서 농사만 짓다가 영어 한 마디 못하면서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미지의 땅에 뛰어들었고, 문화가 다른 생소한 땅에 뿌리박으려고 모험을 감행한 그들의 패기와 용기를 나는 값지게 여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이탈자는 정부의 돈을 한 푼 받지 않고 알몸으로 미국 땅에 발을 붙여 그곳에서 성공함으로써 장차 우리 민족의 자산이 된다는 확신도 피력했다.
이러한 내 진술에 대해 청와대는 이해를 제대로 못하고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는 내 논리를 조용히 경청하더니 알아차리고 묵시적으로 격려까지 했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거칠게 다루다가 결국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이제 돌아가시오. 잘 알았으니 다시 찾지 않겠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고마운 심정으로 나오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문자 그대로 뛰어난 지능(Intelligence)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 이탈자에 대해 내가 품었던 당초의 기대가 결국 적중했다. 1986년의 어느 맑게 갠 날에 덩치 좋은 멋진 신사 5명이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뜻밖에 나타난 이들이 누구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이들이 먼저 자기들을 소개하고 찾아온 사연을 털어놓았다. 이들이 바로 미국 연수농장에서 이탈해 이제 미국 시민으로 성공한 KATP 연수생인데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 처음에는 낯설었던 것이다. 나는 옛 제자들을 만난 듯한 흐뭇한 심정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묵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칼럼을 쓰면서 이 감동적인 일자를 내 일기장에서 찾아보니 그 날이 1986년 8월 21일이었다.
이렇게 추진한 4-H 연수사업(KATP)이 배고프던 시절에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파송된 광부와 간호사들과 함께 우리 민족이 해외에 진출해 그곳에서 성공한 모범적 사례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우리 농촌에서 역동적으로 전개하던 4-H 운동이 오늘날에는 쇠퇴하고 있으니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지난날의 4-H 운동이 더욱 그리워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