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누가 우리를 미혹합니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누가 우리를 미혹합니까


미혹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엇에게 홀려서 정신 차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혹의 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마귀, 사탄일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왜 우리를 미혹하려 애쓰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존재입니까.

그래도 우리는 만물의 영장인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 보암직도, 먹음직도 할 것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정상 가운데 거하는 존재이기는 한 것입니까.

요즘 거리에서 우리 눈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Euphonium 이란 광고로 유혹하는 DRUG STORE입니다.

세상이라는 세력은 참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 힘은 이미 우리가 감당하기에 분명히 버거움을 드러내고 있음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러한 가게들이 합법적인 것이 되리라고 상상하는 것이 불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세력이 불가항력이 되어버렸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음입니다.

참으로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그것이 희망이고 희열일 수 있겠다고 여겨집니까.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그 영혼을 파는 장면과 무엇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소설에서 파우스트는 천사의 협력으로 구출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현실에서 그 미혹의 덫을 벗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고 여겨집니까.


얼마 전에 좀비의 거리가 된 필라델피아를 보여주는 동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그들은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빠르게 걷지도 못하고, 이상한 환희 속에 거할 따름인 것을 우리는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가장 똑바로 서 있고, 빠르게 걷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을 왜 마약(痲藥)이라고 부릅니까.

마귀 말(魔)자는 삼만 자와 귀신 기(鬼)자를 합친 글자이다.

이처럼 마약은 마귀의 역사와 무관할 수 없음입니다.

그러면 마약은 마술을 부리는 약이라는 의미입니까.

마술이라는 것이 허구임을 모르는 자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마술이란 결국 눈속임일 뿐입니다.

허상 즉 우상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을 쫓는 마음이 강박관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강박관념을 벗어나려 함이 곧 죄의식, 탈출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거짓됨이 미혹의 길을 뿌리칠 수 없게 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벗어남에 대해 우리는 해탈이나 극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음입니다.

그러나 미혹들은 이것을 극복이나 회복, 긍정이라고 느끼게 하는 마력을 발휘한다고 여겨집니다.


마술 같음입니다.

자신의 큰 노력 없이 쉽게 벗어나려 함을 충족시켜주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 돈 몇 푼, 즉 푼돈으로 그 지경을 벗어날 수 있으니 마술처럼 다가오는 첩경처럼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입니다.

우는 사자는 멀리에서는 포효하지만 가까이 오면 저 올빼미처럼 소리 없이 순식간에 먹잇감을 가로채 버립니다.


미혹은 과연 풀 수 없는 올무이겠습니까.

왕 사울을 얽매이고 있던 올무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처음은 참으로 겸손이었지만 그의 나중은 교만으로 마치게 됨의 까닭은 무엇이라고 여겨집니까. 그가 입었던 전신 갑주가 단지 군사의 의복이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우리는 신본주의라는 말을 의미도 모르고 사용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것 같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신본주의로 살 수밖에 없다는, 즉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제한성을 부인할 수 없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착각의 현실을 걸어가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미혹되었음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4절에 보면 가시 채 뒷발질하기란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려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신 채를 뒷발질하기가 고생이니라.”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소나 말은 채찍으로 더 맞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헛되이 수고할 뿐임을 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례를 헛되이 벗어나려 애씀 같음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지옥이 없다고 외칩니까.

우리는 흔히 어려운 현실의 삶을 지옥 같다고들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실로 그것이 지옥으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천상의 삶을 우리가 오늘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지옥의 참혹과 참담 역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끝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상의 어떤 어려움과 즐거움도 끝난다는 매력이 있지만, 그때는 끝이 없다는 특성 즉 오늘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없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숨을 끊어도 살아 있는 때가 그때입니다.

천상에서 그 희락이 끝이 없는 것처럼 고통이 끝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고 정의되는 것입니다.


그 지옥에서는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선포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 아를 죽음에 이르게 함에 성공한 다윗이 떠오릅니다.

그는 때로는 온전한 성도였지만, 또 어떤 때는 충실한 이방인 즉 사탄의 세력 앞에 무릎 꿇은 모습을 보이며 우리와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실망하게 하고 있음입니다.

천상에서는 우리야와 다윗 중 누가 큰 자일까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다윗을 보며 우리는 실망할 뿐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웅덩이에서

또 건지심을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되고 오직 믿을 따름의 존재입니다.

사무엘하 12장 1절에 보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됨입니다.

성도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남입니다.

결코 포기하시거나 내어 버려두지 않으시는 어머니 되심 같은 것입니다.

직접 당신을 들어내시어 다윗을 즉각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으시고 사자를 보내시는 온유 하심을 나타내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징계 중에도 그 근본은 사랑이심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심입니다.

성도가 절망해도 될 때가 언제입니까.

내버려 두심을 당할 때 임을 우리는 모두 다 잘 압니다.

그러나 그때가 우리에게 닥칠 때 요행이라고 느끼게 하는 존재가 우리 가까이에 또한 실존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를 화목의 제물로 이 땅에까지 보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양모 하는 날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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