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십자가 위의 일곱 마디 - 그 첫 번째 말씀, 용서 (1)
우리 가운데 그 누가 다만 죽기 위하여 열심으로 오늘을 살아가겠습니까! 물론, 마지못해 삽니다! 요즘 죽을 맛입니다! 고백하시는 성도님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말인즉슨 힘들지만 어떻게든 잘살아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소연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 다른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진정 죽기 위하여 오셨고, 섬기기 위하여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은 왕으로 높임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로 나무에 달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단 살고 봐야 후일도 기약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으며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주시고자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자연스럽게 그의 죽으심과 십자가를 주목하여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 한 것이요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요! 어떤 능력입니까! 구원받은 주의 자녀로 여러분은 오늘도 그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예비된 그 십자가에 자기 몸을 온전히 의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마치 유언처럼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가상칠언이라 하지요. 4권의 복음서에 소개된 이 일곱 마디의 말씀은 모든 복음서에 동일하게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오직 이 한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복음서의 내용을 통하여 예수님은 과연 이 일곱 마디의 말씀을 어떤 순서로 하셨을까 추론하는 것이지요. 사순절의 시간을 지나면서 습관처럼 펼쳐 보았던 이 가상 칠언의 말씀 하나하나를 살펴보면서, 저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바로 이 일곱 마디 말씀 속에 담겨 있음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유언처럼 이 말씀을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하신 것이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은 누가복음 24장 34절을 바탕으로 가상칠언의 첫 번째 말씀의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간구는 “용서”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성질 급하신 분들이라면 스스로 이렇게 되물을 수 있겠지요. 저들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거야? 그러면서 가능한 인물들을 하나둘 손에 꼽아 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음모를 꾸민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이 떠오릅니다. 공식적으로 사형집행을 내린 로마 총독 빌라도 역시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가 빠질 수야 없지요. 물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나, 뿔뿔이 도망친 제자들도 그 목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호하다가 불과 며칠 만에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던 변덕쟁이 무리들 역시 손에 꼽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게 다입니까? 예수님에게 직접 대못을 박은 그 로마 병정들은요! 예수님 대신 풀려난 바라바는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리스트를 작성하다 보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죄인들의 목록에서 결코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가 지적해서가 아닙니다. 이상하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납득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이 첫 번째 용서의 말씀을 통하여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이 땅에 태어난 자와 앞으로 태어날 그 모든 사람들을 “용서”라는 단어로 자신과 함께 묶으셨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한국을 방문하여 멘토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에게는 큰 기쁨이었고, 감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앉은 두 딸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예배 내내 몸을 비비 꼬며, 지루한 듯 연신 하품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더라고요! 아마도 한국말로 그렇게 긴 설교는 처음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엄마, 아빠가 좋다고 너희도 좋은 것은 아니지!
그 장소, 그 시간, 그 예배, 그 말씀까지 도 너희에게는 낯선 시간일 뿐이지! 오히려 그들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한마디의 영어로 그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선생님의 성경 공부 시간이 더 의미 있는 시간임을 알겠더라고요! 구원이 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해야 하는 은혜인지! 왜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자기 십자가가 있어야 하는지! 아, 이 땅에 택하신 영혼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셨던 것이구나!
나를 만나러 오셨던 그 발걸음이 얼마나 복된 걸음이었고, 내게 주신 이 용서의 복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건인지를 내가 잠시 잊고 살아왔구나! 저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이 첫 번째 용서의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아니 이 땅에 오고 가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들임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그 작은 나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온 세상을 정확하게 보셨고, 진단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너무나도 정확한 진단 아닙니다. 까!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쉼 없이 달려가는 인생이지만 그 끝에 누가 계신지,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오직 숨 가쁘게 살아가는 인생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이지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진 이 세상입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다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대로 이 땅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 죄의 영향력은 불의, 추악, 간음,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속임, 낙심, 절망, 우울, 교만한 삶 등의 모습들로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지만, 그 마음에 평강이 없고 쫓고 쫓기는 분주한 삶의 모습 속에 방황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지만, 고칠 수 있을 텐데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이기에 세상은 단지 그 아픔으로 인한 탄식의 소리만 가득한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이 첫 번째 용서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마치 나의 민낯이 드러난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는 은혜의 단어가 바로, 이 용서라는 것이지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