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백합의 향기
목련(木蓮)을 향기가 그윽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백합의 향기는 진한 느낌이 듭니다. 이른 아침 고요함 가운데 정원에 수북이 핀 백합들의 내음은 침침하였던 눈과 머리를 밝고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꽃들의 내음을 맡고 다시 서재로 돌아왔을 때의 감정은 그 이전과 분명히 다른 어떤 흥분됨이 느껴집니다.
새벽녘의 하늘은 점점 어두움을 거두어가고 세상은 그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소명으로 허락하시는 하루를 묵상해 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야 할 소명감 같은 것을 결단하게 됩니다. 내 몸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낼 자격이나 자질을 자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본말의 전도(本末顚倒)라는 말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본말전도의 영어식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Put the cart before the horse.입니다. 말 앞에 마차를 단다는 것입니다. 어리석다 못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본말이라는 한자어의 의미를 살펴보니 한자 나무 목(木)의 아랫부분에 한 획을 더하면 뿌리를 나타내는 본(本) 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윗부분에 길게 한 획을 더 그으면 가지라는 뜻의 말(末)이라는 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한 획을 어디에 긋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바가 너무 크다고 느껴짐입니다.
어떤 위기의식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뿌리 깊은 나무라는 말도 떠올려집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워싱턴주의 나무들이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뿌리가 깊게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철이 되면 뿌리째 뽑힌 아름드리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함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신앙함이 너무 편하여서 뿌리를 밑으로 내릴 필요를 느끼지 못함은 아닙니까. 교회라 이름하는 곳이 너무 많고, 오라고 하는 곳이 늘 있어서 마치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서 나의 형편에 따라서 안이하게 신앙하는 우리는 아닌지 살펴보게 됩니다.
본 말이 전도됨이란 단어를 볼 때 잎만 무성하게 되었다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았던 무화과나무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 가운데에 그러한 모습은 없는지 살펴야 할 때가 오늘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좋은 교육 시스템이 있고 설교를 잘하는 설교자들이 있는 교회는 성도의 수가 많아야 하는 교회입니까.
한 10여 년 전의 한국에서 성도가 5천여 명 되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고백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으로는 그 5,000명 이상의 성도 중에 과연 12명의 제자라도 있을지 장담을 못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다시 목회를 시작하고 싶다며 간절함을 토로하였습니다. 물론 그 목사님의 원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신 교회이겠습니까. 그러면 좋은 교회의 바른 정의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 지향성은 바른 것입니까. 1992년을 재림의 해로 외치면서 한국 기독교 교회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오류인지 사기행각인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사회적 큰 혼란을 일으킨 것은 확실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 속에도 그런 일면이 있다고도 보여집니다. 이제 곧 다시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바른 행위에 조급하였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해석이 자기 편의 위주로 될 때 경험하게 되는 위험도 엄청날 수 있음입니다. 성경에서 정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그대로가 계시임을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초대 교회의 유무상통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복지부동하는 모습을 지탄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지상에 있는 유형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과 육탄전을 벌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7월 21일은 625전쟁의 휴전 협정이 확정된 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425고지에서의 피나는 전투는 7월 17일 휴전 협정을 서로 합의하고서도 12일간이나 더 있었다고 합니다.
실무진의 합의는 있었지만 서명할 쌍방의 대표가 한 곳에 모이기 위한 시일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시지만 아직은 그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왜 우리는 치열하다는 수식어를 자주 붙여 사용합니까.
현실이 버거워서입니까. 현실이 두려워서입니까. 만약에 현실이 버겁고, 두렵게만 느껴진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현실을 벗어나는 것입니까. 그러나 현실에 거하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것은 어리석음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오늘 나에게 맡겨진 소명이라고 여겨집니다. 나무에 핀 연꽃인 목련도 정원에 가득한 백합도 그 향기를 영원히 낼 수는 없음입니다. 오늘 그들이 향기를 뿜어내면 그것이 그들을 오늘에 가지는 소명을 따름입니다. 그 꽃들도 결국은 초라한 모습으로 더 이상 향기를 내지 못하고 다음 해에 또 다른 꽃들이 향기 낼 것을 막연히 기약하고 초라한 모습들로 물러날 따름입니다.
떠나는 이들의 초라한 모습도 일면 남은 자들에게는 은혜로 다가옴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17장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 11절 말씀이 나를 각성케 하였습니다. 뵈뢰아 사람들의 신사도입니다. 그들이 바울과 실라, 그리고 그 일행을 통해서 말씀 앞에 새로워질 수 있게 됨을 묵상하였습니다.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이 거절되지 않기 위해 먼저 깊이 묵상하는 자세가 성도의 신사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온 바울과 그 일행에게 뵈뢰아 성도들은 과연 어떤 존재였겠습니까. 쫓김과 핍박, 매맞음에 익숙하였던 그 일행에게 뵈뢰아 성도들은 잊을 수 없는 향기였을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를 성도 삼아 주신 그 불가항력적 은혜를 삼가 묵상하는 날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