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우리 어머니(2)
<지난 호에 이어>
방학 때 시골에 잠깐 동안 머물면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고, 떡을 만들어 주시고 엿을 고아서 딱딱하게 굳혀 다락방에 넣어 두고는 하루에 두 세 차례 방망이로 때려 조각을 낸 다음에 우리들에게 주셨다. 어머니는 부서진 가루만 잡수시고 덩어리는 한 번도 잡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당시에는 고기나 생선 반찬은 일 년에 몇 번 정도밖에 못 먹었는데, 방학 때 우리가 가면 가끔 고깃국이 밥상에 오르고 생선 토막도 밥상에 자주 올라왔다. 그 귀한 고기를 아버지와 우리들 밥 위에 놓아주시고는 어머니는 한 번도 고기를 잡수시지 않았다. 고기가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시면서 우리들에게만 주셨다.
우리 부모님은 밤잠을 설치면서 부지런히 일하셨다. 낮에는 논밭에 나가 일하셨고, 밤이면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만들어 파셨다. 가마니철이 지나면 나무를 소에 심고, 등에 지고 밤중에 출발하여 숫고개장터에 내다 팔았다. 6Km나 되는 장터를 어떤 때는 거의 매일 다니셨고, 그러면서도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두 동 이상 하셨다.
그렇게 하여 우리 형제들을 공부시켰는데 우리 고향 300여 호 중에 서울 유학을 보낸 집은 모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가난했던 집안을 순전히 근검절약과 노동으로 일구어 놓으셨다. 우리들이 자라서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우리 동네에서 제법 부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으나 그때 우리 부모님은 이미 50세에 접어들었다 아버지는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시골에 소학교 출신도 거의 없었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셨으므로 박학다식한 편이었다. 일가 종중의 일과 동네일을 도맡아 하셨고, 자식들에게는 비교적 엄하셨다. 어머니는 공부를 못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여자들을 학교에 보내면 큰 탈이 나는줄 아는 세상이었다. 머리가 영리하셔서 외삼촌들에게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와 옛날이야기 책을 깡그리 외울 정도였다.
하여간 우리 부모님만큼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은 별로 없을 것이다. 두 분이 열일곱 살에 만나 회혼례(결혼 60주년)까지 치를 정도로 오래(?) 사신 편인데, 아버지가 갑자기 79세에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그후부터 어머니는 주로 형님이 모시고 살았다. "너희 아버지를 따라서 나도 갔어야 하는데 이렇게 오래 살아서 자식들 고생만 시킨다"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정신력이 대단하신 분이다. 불편한 몸으로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하셨고, 식사시간과 취침시간이 일정했다. 5~10분 정도 차이가 있을 정도로 시계처럼 사신 분이다. 식사 후에는 반드시 이를 닦으셨고, 내복과 양말 등은 꼭 손수 빨아 입으셨다.
70 이후부터는 눈이 다시 밝아져서 안경을 안 쓰고 바늘귀를 꿰실 정도였으며, 세수도 하루에 두 번 이상 하셨다. TV를 거의 하루종일 보셔도 피곤하지 않으셨고, 지팡이를 짚고서도 화단의 풀을 뽑고, 물을 주셨다. 자동차 드라이브를 좋아하셔서 일주일 내지 10일에 한 번 정도는 관을 일주하셨다.
작년에 우리 내외가 어머니를 모시고 마지막으로 한국(고향)에 다녀왔는데, 비행기 안에서 멀미도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기운이 팔팔하셨다. 시골에 가셨을 때 일가친척들 앞에서 "죽기 전에 이렇게 고향 산천을 다시 보고, 자네들을 만났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하시더니, 일 년 만에 그 정든 고향 땅으로 돌아가셔서 아버지 옆에 영원히 잠드셨다.
병원에서 형님과 나를 보실 적마다 집에 가겠다고 우시던 어머니가 집에 오신 지 나흘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일은 집에 오신 후 운명하실 때까지 통 식사를 못하셨고, 조용히 누워서 기도로 하나님 곁에 갈 것만을 원하시던 모습이 몹시도 안쓰럽고 민망했다.
우리들은 매끼마다 음식을 먹고 잠도 그런 대로 잤는데 어머니는 외롭게 혼자서 계셨으니 세상에 이런 불효가 어디 있을까!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큰일(장례)을 치를 걱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우리 곁에서 긴 잠을 주무시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별로 슬픔을 느낄 수 없었다.
가족묘지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에 합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두꺼운 흙으로 어머니를 덮을 때 비로소 울음이 터졌다. 더욱 허전하고 서글픈 일은 텅 비어 있는 어머니의 방이다. 침대 위에는 아직도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옆에는 태극부채가 그대로 있다. 옷장에는 지금도 어머니의 옷이 걸려 있고, 신장에는 구두가 그대로 있다.
나는 혼자 어머니 방에서 실컷 울었다. 살아 계실 때 좀더 잘 해드릴 걸, 혈압이 높았어도 맛있는 음식을 더 해드릴 걸……. 왜 내 가슴이 이렇게 텅 빈 것같을까! 어머니의 방만큼이나 크게 비어 있는 내 가슴을 이제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출근할 때마다 창가에서 나를 배웅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 인자한 미소와 따스한 손길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새 짚신을 신고 아버지를 따라가신 우리 어머니! 아픔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나라에서 고이 잠드소서!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