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황혼

전문가 칼럼

[정병국칼럼] 황혼

"늙어가는 길/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이 마음과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 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 두리번/ 찾아 봅니다./ 앞 길이 뒷 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 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보다 / 아름답다는/ 해넘이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이인호의 시> 


이 시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마치 지금의 나를 두고 지은 시처럼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아마 내가 그 나이 정도 된 탓일까? 하여간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어느새 이렇게 늙은이가 되었나? 이런 생각들이 가슴을 약간 아프고 아리게 한다. 


인생이 이 세상에 왔다가 한세상을 살고 가는 것은 사실이고 하나님의 뜻인데 나이가 들어 가면서 느끼는 것은 그저 허무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뒤돌아보면 내 나이 50대부터 70대까지는 그냥 뛰어넘은 것처럼 빨리 지나갔다. 언제 나에게 50대와 60대, 70대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을 보면 내가 세상을 꽤 오래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다. 자식들을 보면 내 나이가 꽤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제 앞으로 남은 삶이 살아온 삶보다 훨씬 짧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제 얼마나 더 오래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하여간 많이 남지는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제 남은 삶을 보람 있고 멋지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될는지 모르겠다. 행복한 삶이나 보람있는 삶은 생각하기에 따라 정의되고 있지만 후회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한 세상의 삶이 그런대로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런 대로 내 취미에 맞게 살아왔다. 글도 쓰고 여행도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으면서 비교적 잘 살아왔다. 부를 누리며 살지는 못했지만 그런 대로 잘 살아왔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분의 덕이다. 젊었을 적에는 세상 살이가 바쁘고 고단했지만 그런 대로 잘 견디며 산 것은 근검 절약한 아내의 덕이라고 생각된다. 


작은 수입으로 살림하느라고 허리를 졸라매고 쿠폰을 모아 식품과 생활 용품을 구입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잘나고 잘 해서 지금까지 잘 산 것이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이 잘 한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다. 지금 나이가 들면서 세상살이가 때로는 두렵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럴 적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이제 황혼길에 들어선 내 자신이 좀 불안하지만 그럴 적마다 혼자 마음을 다잡고 기도를 한다. 어떤 때는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며 음악을 듣기도 한다. 음악, 특히 고전 음악은 내 마음을 달래주고 만져주는 역할을 한다. 남들이 들으면 개똥 철학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주 진지하다. 어떤 때는 아침에 일어날 때 다리에 힘이 없고 침대 모서리를 짚어야 할 때도 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이것이 인간이 늙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세상에 왔다가 한 세상을 살고 가는데 그 기간이 참으로 짧고 빨리 지나간다. 나이가 들고 늙어가면서는 세월의 흐름에 가속도가 붙는 듯하다. 어릴 적에는 세월이 지겹게도 더디 가더니 늙어가면서는 금세 일년이 지나고 계절도 몹시 빨리 바뀐다. 


봄과 가을은 3개월씩이 아니라 1개월 만에 지나가는 듯하다. 봄이 오나 했는데 어느새 가을 단풍이 곱게 들고 좀 더 지나면 나무에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이 온다.  우리 인간도 나이가 들면서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워진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짧다는 걸 알기에 한 발 한 발 더디게 걸어보지만 그래도 세월은 더디게 가지 않는다. 


이제 이미 석양에 가까이 왔으니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해 본다. 그러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가지만 세월은 그런 발걸음에 맞추어 걷지를 않고 제 속도대로 달려간다. 70대는 70마일로, 80대는 80마일로, 90대는 90마일로.... 


이때가 되면 세월은 중간에 한 번 잠깐 서 있다가 휙 지나간다. 눈 깜짝할 사이처럼 그렇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걷는 모습과 발자국은 늦지만 우리네 몸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걸어가고 있다.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처럼, 해돋이보다 아름다운 해넘이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싶다. 그런 걸음이 아무리 느려도 아름다운 노을처럼 잠깐인 것을.... 그래도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독서를 많이 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 세월이 조금 더디게 간다. 세월의 빠름을 잊고 독서삼매에 빠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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