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우리 어머니(1)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2주 전쯤에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하셨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예쁘게 짚신을 만들어서 어머니의 두 발에 신겨드리고는 웃으면서 가시더라는 것이다. 이 꿈 이야기를 하시면서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 곁으로 갈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몸이 좀 불편하셨고 식사를 제대로 못 하셨다. 이번에 도저히 회복이 안 될 것이니 아예 병원에 입원도 시키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10일간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형님 댁으로 오신 지 나흘 만에 향년 90세를 일기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셨다. 나는 가끔 꿈을 꾸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통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운명하시던 밤에 꾼 꿈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으니 빨리 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으나 너무나 생생하여 벌떡 일어났다. 6월 8일 새벽 4시 반이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형님 대에 도착한 것이 6시 5분 전이었다.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불규칙한 호흡을 계속하셨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한참 동안 조용하셨다. 전날 저녁부터 이런 식의 호흡을 반복하셨는데 한참 동안 이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침을 삼키는 듯한 '꼴깍' 소리가 났는데 그 이후부터는 호흡이 멎었다. 새벽 6시 15분에 운명하셨다. 어머니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다.
살아 계실 때보다도 더 화평하고 평온한 모습을 보고 우리 형제는 어머니가 이미 하늘나라에 가신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못 본 것이 한이 되었는데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게 해주신 어머니의 배려에 감사할 뿐이다. 형님과 나는 침대 밑에 무릎을 끓고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평온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존경하는 대상은 어머니이다. 자식이 강도나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자식이 어머니보다 먼저 가면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이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정말로 특별한 분이셨다.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하시면서 2주일 후에 하나님 곁으로 갈 것이니 모든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이 사실을 형님께 말씀드렸고, 먼 데 있는 직계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에 계실 때였는데 자꾸만 형님 댁으로 가시겠다고 했다. 결국 형님이 모시고 갔는데 그로부터 정확하게 14일 만에 말씀대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집에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는데 큰며느리만 안 가니 꼭 함께 교회에 다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고된 일만 하면서 살아오신 어머니가 이렇게 장수를 하신 것
은 우리 어머니가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열일곱 살에 우리 집에 시집을 오셨는데, 와보니 3대 홀아비집이고 시할아버지는 노망(치매)이 들어서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옷을 빨 때는 이불 속에 한 사람씩 그대로 있게 하고 빨래를 했다. 대소변을 못 가리는 시할아버지는 매일 빨랫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 어머니는 원래 체질이 약하고 잔병을 많이 앓으신 분이었다.
외삼촌 세 분이 모두 60을 넘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유독 우리 어머니만 90을 사셨다. 성경에도 부모에게 효도하면 장수한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 다. 10여 년 전에 오른쪽에 중풍을 맞아 반신을 못 쓰시지만 매일 운동하고 기도하시면서 건강을 되찾으셨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셨고, 노인들 파티에도 꼭 나가셨다. 괌에 있는 한국 교포 중에서 최장수를 하셨다.
회사 일로, 교회 일로 늘 바쁜 내가 출근할 때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창가로 다가와서 손짓과 미소를 보내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볼 수 없다. 저녁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때까지도 저녁을 안 잡수시고 기다리시던 어머니!
밥을 한 술만 떠 드려도 반을 남겨서 꼭 나에게 주시던 어머니! 맛있는 음식이나 과일을 드리면 늘 안 잡수신다면서 내 앞으로만 밀어 놓던 어머니! 동생네 집이나 형님 대에서 우리 집에 오실 때는 늘 초콜릿이나 과자를 싸가지고 와서 내놓으시던 어머니! 퇴근 때가 되면 늘 지팡이를 짚고 문 밖을 내다보시던 어머니! 그 인자한 모습을 다시는 볼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군에 갔던 형님이 중병을 얻고 의병제대를 하여 돌아왔다. 정말이지 씨와 가죽만 남은 몰골이었고 그 당시 병원시설은 형편없어서 절망적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큰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차라리 그 병을 나에게 주고 큰아들은 건강해야 한다고 기도하셨다.
형님이 밥을 안 먹고 짜증을 부리면 어머니도 단식을 하셨다. 보다 못한 형이 억지로 밥을 먹었고, 어머니는 형님을 부둥켜안고 한없이 우셨다. 내가 어렸을 적에 방학 때 풀을 썰다가 엄지손가락 끝이 작두에 잘린 적이 있었다. 내가 풀을 작둣날에 먹이고 어머니가 발로 밟았을 때였는데, 엄지손가락 끝이 잘리면서 피가 뻗치는 것을 어머니가 보시고는 그 손가락을 얼른 입속으로 집어넣고 혀로 막았다.
손톱 뿌리는 남았으므로 다시 손톱이 났고 상처도 아물었다. 그 이후 어머니는 작두로 풀을 썰 때마다 다른 사람을 시켰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셨다. 대가를 바라거나 무슨 목적이 있어서 주는 사랑이 아니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