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금 간 항아리의 교훈(敎訓)
12달 달력 1장이 붙어있다. 2023년도 며칠 안 남고 세모(歲暮)를 향해 세월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내가 교직(敎職)에 있을 때의 일이다. 며칠 남지 않은 연말에 교육원에서 교사연찬교육을 받았다. 그때 강사로 나온 모 대학 교수가 작가(作家) 미상의 ‘금 간 항아리’에 관한 강의를 하여 감명을 받은 바 있다.
그 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양어깨에 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다.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하나씩의 항아리가 있었다. 그런데 왼쪽 항아리는 금이 간 항아리였다. 물을 가득 채워서 출발했지만, 집에 오면 항아리의 물은 반쯤 비어 있었다. 금이 갔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른쪽 항아리는 가득 찬 모습 그대로였다.
왼쪽 항아리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님, 나 때문에 항상 일을 두 번씩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금이 간 나 같은 항아리는 버리고 새것으로 쓰세요."
그때 주인은 금이 간 항아리에게 말했다.
"나도 네가 금이 간 항아리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네가 금이 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바꾸지 않는단다. 우리가 지나온 길 양쪽을 바라보아라."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오른쪽 길에는 아무 생명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이지만, 왼쪽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니?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니?
나는 그 생명을 보며 즐긴단다."
많은 사람은 완벽함을 추구한다. 자신의 금이 간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어떤 때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 낙심에 빠질 때도 있다. 또는 남과 비교하여 끊임없이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이 삭막하게 되는 것은 금이 간 인생 때문이 아니라 너무 완벽한 사람들 때문이다.
너무 완벽하게 물이 맑아도 고기가 살지 못한다. 조금 흐린 흙탕물에서 오히려 잘 자란다. 선산을 지키는 소나무는 곧게 자란 완벽한 나무가 아니라 등이 굽은 못생긴 소나무이다. 사회도 이와 같이 조금 금이 가서 새는 그런 부족한 자를 통해 소중한 열매가 맺힌다.
나는 일제강점기 때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새 학기가 되어 공책(노트) 등 학용품을 사려고 할아버지께 돈을 달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으셨다. 난 1,400원(현시가 환산)이 필요하다고 대답하고 종이에 적은 것을 보여 드렸다.
그것을 보신 할아버지께서는 "아! 그놈 참 똑똑하다. 아주 빈틈이 없구나."
라고 칭찬하시고 딱 1,400원만 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버럭 화를 내시며
"야! 1,400원이 다 무어냐? 왜 그리 옹졸하냐? 자! 2,000원 줄 터이니 학용품 사고 남은 돈은 네 마음대로 눈 깔사탕도 사서 네 또래 동무들과 나누어 먹어라."
하시며 쌈지에서 돈을 꺼내 주셨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완벽한 것을 싫어하셨다. 나의 어린 마음으로 빈틈없이 꼼꼼히 필요한 돈을 달라고 할 때 대견히 여기고 그 ‘필요한 돈만’ 주실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즉 각박한 황무지보다는 금이 조금 가서 물이 새어 푸른 초원을 이루는 그런 사람을 원하셨던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지인(知人) 부부는 모두 일류명문대를 나왔다. 그들은 똑같이 너무도 완벽하였다. 아들의 공부도 성적이 날로 향상하고 공부 욕심이 많아 늘 1등을 하려는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아이가 스마트 폰을 보고 있을 때나 TV를 볼 때마다 "공부하라. 공부하라"고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
그 집 아이는 너무도 완벽한 부모 때문에 서서히 개성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 부모는 아이가 반에서 2등을 해도 안 되고, 1등을 해도 전교 1등을 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 아이의 심성(心性)은 아스팔트 바닥처럼 메말라 갔다. 완벽한 물 항아리가 지나간 곳처럼 삭막한 황무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영국에 한 초선의원이 의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연설은 청산유수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잘해 기립박수를 여러 번 받았다. 연설을 마치고 연설의 대가(大家)인 원스턴 처칠을 찾아가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물론 아주 완벽한 연설이라고 칭찬받을 줄 알고 한 부탁이었다. 그런데 처칠의 대답은 의외였다.
"다음부터는 연설을 할 때 일부러 좀 더듬거리게나. 너무 완벽하게 하니 오히려 정이 떨어졌다네." 한 방울의 물도 떨어지지 않는 완벽한 항아리는 황무지를 만든다.
나도 충청도 태생이지만 충청도 사람들은 말도 느리고 행동 또한 느리다. 오후 2시에 만나자는 시간 약속을 할 때 딱 잘라 2시라 하지 않고 '두어 시 경(頃)'이라고 한다. 여기서 '경(頃)'이란 한자는 '근처'란 뜻으로 2시 근처의 시간을 가리킨다.
두루 뭉실하게 2시 경(근처)이라 했으니 1:30도 좋고, 2:00도, 2:30도 좋다. 완벽하게 칼날처럼 정확히 2시 정각으로 약속하는 것은 각박하고 융통성이 없고 너무 완벽하다. 하지만 1초가 급한 약속은 제외된다. 충청도 시골 산길을 처음 찾아가는 사람이 일하는 농부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얼마를 가면 되느냐고 물었다.
"한 이십 리(二十里)쯤 가면 되유" 라고 하였다. 이십리를 가도 목지에 도착을 못 하자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한' 십 리 남았슈"라고 한다. 여기서 '한‘이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이란 딱 떨어지게 얼마라고 정확히 말하지 않고 대강, 대충 얼마라고 말할 때 쓰는 말이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정확히 몇십 리라고 말하지 않고 ‘한’이라 말을 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들만 산다면 너무 삭막하여 질식(窒息)할 것이다.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 조금은 손해 보는 것을 알면서 어수룩한 사람처럼 베푸는 사람이 마치 금 간 항아리에서 흘러내린 물로 무성한 초원을 이루듯이 사회를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고 강사는 말했다.
용(龍)띠 새해를 맞이한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福) 많이 받고 건승(健勝)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