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책가방과 보자기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책가방과 보자기

나는 책을 책보(보자기)에 싸가지고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는 광목으로 만든 책보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는데 그게 힘들 때면 책보를 어깨에 메고 다녔다. 어렵던 시절이라 폼 나는 책가방에 책을 넣어 다니는 아이들은 반에서 두세 명에 불과했다. 누구나 책보를 버리고 멋진 새 가방을 들고 다니기를 원했다. 나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이를 보면 은근히 부러웠다.


우리들은 매일 산모퉁이를 돌아 바람 부는 들판 길을 가로질러 오리(五里)길 학교를 오갔다. 추운 겨울날 책가방을 든 아이들은 손을 번갈아 가며 호호 불어 입김으로 녹여야 했지만 나는 책보를 어께에 둘러멜 수가 있어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어 따뜻하게 하였다. 이것으로 가방에 대한 부러움을 달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책가방을 사 달라고 할아버지께 졸라대었다. 얼마 후 예산 오일장(五日場)에 가셔서 당신이 몹시 아끼던 씨암탉 여러 마리를 내다 팔아 책가방을 하나 사 오셨다. 그 당시 가방값이 상당히 비싼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가방에서 가죽 냄새가 향긋하게 모락모락 피어났다. 책보에 밴 김칫국물 냄새와 어머니의 체취와는 달리 도시에서 찾아온 양복쟁이 손님의 옷에서 나는 신선하고 야릇한 그런 냄새였다. 나는 그날 밤 가방을 가슴에 껴안고 잠이 들었다. 꿈에 내 가방을 보기 위해 여러 명의 아이들이 모여들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이제 매일 같이 책보를 풀고 싸는 번거로운 일을 안 해도 되었다. 가방을 열면 안에는 책, 필통과 도시락을 넣어 두는 칸이 거짓말처럼 가지런히 있어 참 편리하였다. 나는 아침에 할아버지께 인사하고 가방을 들고 보란 듯이 으스대며 학교에 갔다. 또래 애들이 선망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어제 장에 가서 사다주셨다.”라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나 그 기쁨과 좋았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를 않았다. 책보자기는 풀어 접어서 내 책상 안에 넣으면 달리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도 되는데 가방은 책과 필통, 도시락을 꺼내어도 그 모양은 조금도 줄지 않고 그대로였다.


또 비좁은 교실에서 커다란 가방을 두는 장소도 문제였다. 가방을 의자에 걸어 놓았더니 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거추장스럽다고 마치 샘이 나서 일부러 하는 것처럼 툭툭 치고 지나갔다. 그럴 때면 새 가방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아는 어른들이 농사지은 수박이나 참외 옥수수 같은 것을 따서 아버지께 드리라고 주면 그것을 받아 책가방에 넣어도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책보는 둥근 수박, 고구마, 참외, 옥수수 등 무엇이든지 주는 대로 다 쌀 수 있었다. 


옛날 어머니들은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리면서 사셨다고 한다. 이 시집살이가 하도 고달파 엽전 하나를 꺼내어 그것이 닳도록 손아귀에 넣고 굴림으로써 고통을 참으며 스트레스를 해소시켰다고 한다. 이 굴림 돈을 고통을 참는다는 뜻에서 인고전(忍苦錢)이라 했다. 다 굴리고 나면 동전 한 닢을 아주 ‘작은 보자기’에 싸서 할머니가 보실까봐 장롱 깊이 숨겨 두곤 하셨다.


보자기는 이렇게 작은 초 미니보자기로 부터 시작해서 그 옛날에 과부를 보쌈해 올 때 썼다는 ‘과부보’ 같은 초대형 보자기에 이르기까지 크기도 다양하였다. 그렇게 폭넓은 기능을 다 하는 보자기는 접어놓으면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무(無)로 돌아가려는 겸손(謙遜)함마저 갖고 있다.  


가방은 속을 다 채우지 못하면 빈 상태로 남는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꽉 찬 것처럼 속여(詐欺) 허세를 부린다. 반대로 속이 다 차면 그 이상은 조금도 더 담기를 거부하는 냉정한 오만(傲慢)이 있다.

서류 가방에 수박 하나 더 넣을 공간이 없고, 핸드백에 여성 잡지책 하나 더 넣을 곳이 없듯이 융통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보자기는 크고 작고에 상관없고, 아무거나 거절하지 않고 모두 다 싸는 수용력(收容力)이 있다.


보자기는 어머니가 예쁘거나, 밉거나, 잘 생겼거나, 못생겼거나를 불문하고 자식들을 다 감싸듯이 담고 싶은 물건만 담고, 담기 싫은 물건은 담지 않는 차별(差別)도 없다. 가방은 형식적이고 보자기는 지극히 실용적이다. 그래서 나는 가방보다 더 보자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보자기는 싸는 것만 아니라, 까는 것, 쓰는 것, 두르는 것, 덮는 것, 씌우는 것, 가리는 것, 메는 것 등, 때에 따라, 필요에 따라 변하고 그 용도도 한없이 많다.

큰 보자기는 여름에 모기에 물리지 않게 덮으면 ‘홑이불’이 되고, 허리를 질끈 동여매면 ‘허리띠’가 되기도 하고, 감기나 코로나에 걸릴까 봐 입을 가리면 ‘마스크’가 된다. 


나그네가 어깨에 메고 먼 여행길을 떠나면 ‘괴나리봇짐’이 되고, 문에 치면 ‘커튼’이 된다. 또 머리에 둘러쓰면 ‘스카프’나 ‘모자’가 되기도 하고, 목에 두르면 ‘목도리’가 된다. 알지 못하게 얼굴을 가리면 ‘복면보’(覆面褓)가 되고, 땀과 눈물을 닦으면 ‘손수건’이 된다.


책을 싸면 ‘책보’, 밥상을 덮으면 ‘상보’가 된다. 뿐만 아니라 보자기는 살아있는 닭까지 쌀 수가 있다. 떠나가는 연인(戀人)에게 들어서 흔들어 보이면 눈물 핑 도는 석별(惜別)의 정(情)이 나부낀다. 남녀가 깔고서 나란히 정답게 앉아 사랑을 속삭이면 ‘데이트(date)방석’이 되고, 연인(戀人)이 머리를 맞대고 덮어쓰고 뽀뽀하면 ‘키스 텐트’(kiss tent)가 된다. 부엌일 할 때 앞에 두르면 ‘앞치마’가 된다.


데모할 때 어깨에 두르면 ‘어깨띠’가 되어 구호를 대신하고, 미스 코리아가 어깨에 두르면 진, 선, 미의 아름다운 이름 석 자를 알리는 ‘어깨띠’가 되기도 한다. 또 이마에 두르면 투쟁의 ‘결의(決意)’를 상징한다. 장대에 달면 ‘깃발’이 되어 나부끼고, 또 장례식의 ‘만장기(萬丈旗)’가 되어 긴 행렬을 잇기도 한다.


아기를 업으면 ‘포대기’가 되고, 갓난아기에 채우면 ‘기저귀’가 된다. 덮으면 ‘이불’, 깔면 아기 ‘요’가 되며, 한 많은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얼굴에 덮고 저승 가는 ‘마지막 보자기’가 되기도 하니,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자기는 한국적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무궁무진한 요술쟁이다. 


이런 보자기가 최근 미국에서 친환경(親環境) 포장재(包裝材)이자 인테리어 소품(小品)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예술적인 디자인의 재활용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이제 보자기는 한국에서 더 이상 촌스러운 옛것이 아니요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 고유의 생활소품 문화를 이르고 있다.


지금은 모두 백 팩(back pack)을 메고 학교에 다니지 책보를 가지고 고풍(古風)스럽게 다니는 학생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책가방보다는 책보자기를 통해서 너그럽게 감싸주는 포용력(包容力)을 배웠고, 책보에 싼 내용물을 꺼내어 접으면 아주 작은 존재로 낮아지는 겸손(謙遜)함도 학습하였다. 그래서 비록 김칫국물 냄새가 어머니의 체취(體臭)처럼 배어있지만 나와 친구가 된 정 들었던 책보자기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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