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십자가 위의 일곱 마디, 그 세 번째 말씀 –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1)
신앙의 길을 걷는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십자가의 참 의미를 명확하게 알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의미는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님을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지요. 오래전에 읽은 책 가운데 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한 부분의 소제목만큼은 선명하게 기억나는 책이 있습니다.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면서 묵상하게 된 가상칠언은 십자가의 의미들을 마치 예수님이 유언처럼 들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십자가를 이렇게 묘사한 것이 아닐까요!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십자가의 도란 영어로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The Message of the Cross, The Preaching of the Cross” 십자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들어야지만 믿음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한 마음에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쓰는 수고가 아니라 어쩌면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잘 들을 수 있도록 그 앞에 조용히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입니다. 요 19:25-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그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두 무리의 긴 행렬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한 무리는 예수를 죽이고자 음모를 꾸민 정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또한, 이 일이 어떻게 되는가?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몰려든 백성들입니다. 성경은 그들 모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마 27:39-41)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 그렇게 모인 자들은 한 마디로 구경꾼들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또 하나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여인들입니다. 눅 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고 모셨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여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열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이 두 무리들!
같은 곳에 서 있지만, 너무나도 다른 이 두 무리들을 향하여 십자가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십자가는 내가 예수님과 맺고 있는 그 관계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단지 십자가의 구경꾼인가! 아니면 그 십자가에 동참하는 제자인가! 지금 이 두 무리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표현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신앙은 결코 무대포가 아닙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면,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보면, 그를 향하여 내 감정을 쏟아내면 믿음이 저절로 들어와 새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구경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자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분명 예수님의 기적을 그 현장에서 보고 체험했던 자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오병이어의 떡을 먹었던 자들이고,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낫는 기적을 두 눈으로 지켜본 자들일 것입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그 가르치는 권위에 놀라워했던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열렬히 환호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사소한 것이 없습니다. 귀한 체험이고 간증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 십자가 앞에서 다만 구경꾼이요 방관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지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끼고의 문제 만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본 것이, 내가 들은 것이, 내가 느낀 것이 지금 나의 삶 가운데 무엇을 도전하고, 무엇을 깨닫게 하며, 어떤 삶을 살게 하는지 깊이 들려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던 것이지요.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어떻게 십자가의 메시지가 누구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요, 또 다른 누군가 에게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으로 나타나는가 생각해 보라고 도전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조건 믿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매 순간 왜라는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나는 왜 믿어야 하고, 어떻게 믿어야 하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묻는 삶인 것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 화려한 꽃길을 신나게 달려가듯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이 있습니까! 오히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삶을 견뎌야 하나? 끊임없이 던져지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도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인 것을 그들은 하나하나 믿음이란 이름으로 배워 갔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은 결코 내 의지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내 결단과 각오가 중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그 힘으로 내가 딛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안에서의 삶을 이렇게 말하지요.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요!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내가 사는 것인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몰려든 그 골고다 언덕의 수많은 구경꾼 속에 혹시나 내 모습은 없는가 돌아봅니다.
숱한 복음의 메시지를 들었고, 날마다 은혜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는 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위해” “나 때문에” 살아가는 “나”라면 그런 “나 역시나” 구경꾼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이 고백을 마음에 떠올려 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