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예수, 가장 귀한 구원의 이름 (1)
십자가 위의 일곱 마디, 그 두 번째 말씀 – 예수, 가장 귀한 구원의 이름 (1)
요즘은 십자가 없는 교회도 참 많지요! 저 어렸을 때 만해도 옥상에 올라가서 주변을 보면,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의당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교회의 십자가가 가장 높이 달린 것은 그 누구라도 잘 볼 수 있도록, 위로가 필요한 자들이라면 반드시 이 십자가 은혜의 자리로 나오라는 간절한 초대요, 외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십자가는 또한 가장 강력한 역설이기도 합니다. 죽어 마땅한 자가 십자가에 달렸다면 그것이 어찌 역설이겠습니까! 의당 자기 죗값을 치른 것이지요. 그러나, 그 십자가에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 달렸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역설이지요. 그리고 그 역설은 언젠가는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 나의 허물과 죄를 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다름 아닌, 그 십자가 그늘 아래 서는 삶입니다. 그곳에 서면 참 신기하게도 나의 허물과 죄가 드러나 치유의 은혜가 임하게 되고, 또한 그 피가 나의 삶에 뿌려져 내 인격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지요.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그것을 체험한 자의 강력한 선포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그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합니다. 유월절이 곧 시작 되기에 한시라도 빨리 그 십자가 형을 마무리하기 위함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그 광경을 지켜 보고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함께 골고다 언덕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날 골고다 언덕에는 하나의 십자가가 아닌,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집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죽음까지도 죄인들과 함께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이 하나같이 예수를 모욕하며 비웃고, 조롱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다 하는 자여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니 ... 참 신기하지요! 그들이 한 모든 말들이 다 예수를 향한 조롱이고, 비아냥이고, 수치와 모멸감을 주기 위한 것들인데 그 모든 말들은 다 진리였습니다.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들이 그 진리의 말씀 안에서 마음의 찔림을 받고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진리가 진리인 것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십자가 위에서 가장 먼저 용서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그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죄인들과 당신을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회개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기도에 친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두 번째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23장에는 그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행악자 가운데 한 사람의 회심 기도가 소개됩니다. 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에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그렇게 온 세상을 향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영혼을 향합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죄악이 무엇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이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돌이켜 회개하는 자가 되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장면을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지요. 아, 무엇보다 구원은 내 생애 가장 마지막 순간에도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이구나!
아, 구원은 내 삶이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소망 하나 없는 나의 삶에 서슴지 않고 찾아올 수 있는 은혜이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은 내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부르고 찾을 때 주어지는 은혜이구나!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의 선물이라! 그러나, 이 구원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조건 없는 은혜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오직 믿음으로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날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 양옆의 두 죄인 모두 구원을 말하지요.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두 사람 다 구원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둘의 고백은 그 마음의 중심이 전혀 다른 것이지요. 한 사람은 여전히 비방하고, 조롱하는 마음으로 외친 소리였을 뿐이고, 다른 한 사람은 회개를 통한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은 오직 은혜일 뿐 아니라, 또한 오직 믿음인 것입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한 영혼의 그 간절한 부르짖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낙원이 과연 어디인가 우리는 그 실체에 대하여 다 알 수 없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예수여, 나를 기억하소서 부르짖었던 그 영혼은 그날 그 죽음의 강을 건넌 후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그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그렇게 끝이 아님을 알았을까요! 그는 예수님이 죽음을 통하여 완성할 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었을까요! 과연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나라에 속하여 살아왔는지를 알면서 후회했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간절히 예수를 붙들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행위나 공로가 아님을 온 마음으로 깨달은 것은 아닐까요!
물론 성경은 그날, 이 행악자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와 어떤 깨달음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에 대하여 바울은 이런 말씀을 선포합니다.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구원은 이렇게 우리 삶의 근거지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절대 절명의 시간 속에서 한 영혼 안에 일어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것이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 말하는 것 아닐까요!
한 사람의 죽음과 그로 인한 한 영혼의 구원! 그것이 그날 골고 다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마치 나비 효과처럼 온 세상의 구원이 바로 이 예수의 십자가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