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회계사] 팽창주의와 자유 3

전문가 칼럼

[안상목회계사] 팽창주의와 자유 3

저명한 사전의 정의를 따르면, 언론의 자유(freedom of the press)는 신문, 잡지 기타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소식을 보도할 권리(the right of newspapers, magazines, etc., to report news without being controlled by the government)다. 레닌은 언론의 자유를 조롱했다. 그 레닌이 언론의 자유에 대해 한 말은 다음과 같다. 


“Freedom of the press?  It is actually freedom for the rich to own the press and propagate their bourgeois views and befuddle the people  언론의 자유라고? 그것은 부자들이 언론사를 소유하여 부르조아의 견해를 선전하고 인민을 혼란시킬 자유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레닌의 저 말은 황당하지만, 그 당시의 환경과 레닌의 지성을 고려하면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레닌은 언론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 같은 전통적 자유를 형식만의 자유(formal freedom)이라 하고, 노동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실질적 자유(actual freedom)라 했다. 이 구분인 다소 난해하나, 이솝의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언론의 자유를 목이 긴 단지 속의 수프라고 한다면, 부르조아는 긴 주둥이를 가진 두루미와 같고 프폴레타리아는 주둥이가 짧은 여우와 같다. (자유의 문맥에서 레닌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레닌의 눈에는, 진정한 의미가 있는 자유, 즉 노동착취의 자유로 가는 길을 언론의 자유가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닌의 저러한 생각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착취를 벗어나는 길이 없다는 전제에서만 성립하며, 그러한 전제는 마르크스가 만든 것이다. 만일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노동착취를 벗어나는 길이 있다면, 마르크스는 설 자리가 없고, 레닌은 자유에 대해 잘못 말한 것이다. 


칼럼 765호(계급투쟁설 6)에서 본 바, 미국의 일각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이나기 전인 1914년부터 노동착취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헨리 포드가 그 길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포드 자동차를 설립할 때 포드가 꿈꾸었던 “포드 회사의 모든 종업원이 포드 자동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시대”는 1914년부터 시작되고 있었떤 것이다. 


포드의 그 일이 자본주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레닌(1870-1924)은 알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트로츠키(1879-1940)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적 스탈린(1878-1953)에게 정권쟁탈전에서 패배하고 망명을 떠난 트로츠키는, 멕시코 망명 중이던 1938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같은 1938년애 미국은 주 40시간제를 법으로 만들었다.)


“The most efficient way to fight the bourgeois press is for the workers’ press to develop. 부르주아 언론에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노동자 언론이 개발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대스승이라면, 레닌과 트로츠키는 사형사제 사이였다. 주 40시간제라는 제도를 통하여 버젓이 노동착취로부터 벗어나는 자본주의 세상을 보며, 트로츠키는 자신의 언론활동과   미국의 성취를 연관지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마르크스의 일생과 저작이 모두 언론활동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 레닌과 트로츠키가 망명지에서 함께 운영한 마르크스주의 잡지 “이스크라(불티)”도 언론활동이었다. 트로츠키의 입장에서는, 자기네의 그러한 노력이 미국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트로츠키 말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지난 주 칼럼(775호)에서 본 바, 레닌은 윌슨보다 더욱 열렬하게 자결주의를 지지했다. 레닌이 구축한 독재정치 체제에서 언론을 억압하고도 그 자결주의를 지킬 수 있으려면, 독재 통치자의 인격이 그만큼 고상해야만 한다. 


자결주의를 존중한다는 문맥에서 언론이 해주는 역할은 비판이다. 비판이 없어도 독재 통치자가 옳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그 통치자가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있고 또 그 옳은 것을 실행할 만큼 인격이 고상해야만 한다.  


역사 속의 독재자들은 대체로 언론의 비판이 없이는 무엇이 옳은지를 알아내기 힘들어했다. 또, 옳은 일을 알아도 그것을 실행할 만큼 고상한 인격의 독재자는 많지 않았다. 여기에 레닌의 설계 오류가 발견된다. 더욱이, 헨리 포드의 성취가 증명한 것은 포드의 인격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무지였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무지는 칼럼 659호부터 24개의 칼럼에서 자세히 해설되어 있다.  


자결주의 존중과 언론의 자유 말살 등 두 가지 양립하기 힘든 정책을 만들어 놓고 레닌은 1924년에 죽었고, 그의 권력은 스탈린이 이어 받았다. 스탈린은 레닌과 인격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동물농장의 돼지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모델로 하여 창조된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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