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회계사] 마르크스 비판 모델 (물)
마르크스는 소매상이라는 존재를 자본주의 체제의 병폐로 보았다. 소매상은 상품을 낮은 값에 사서 높은 값에 판다. 사 올 때와 팔 때 사이에 그 상품에 일어난 물리적 변화는 없다. 같은 물건에 두 개의 값이 정당할 수는 없으므로, 파는 값이 정당했다면 사는 값은 너무 낮았던 것이며, 두 값의 차이는 만든 자의 노동이 착취당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정당한 교환은 가치가 같은 것끼리의 교환이다” 하는 생각이 깔려있고, 그것은 마르크스가 창안한 생각이 아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런 말을 했고, 경제학자 리카르도도 얼른 들으면 그런 말인 듯한 말을 했다. 그러나, 경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쉽게 이해할 만한 것이 아니고, 리카르도의 말은 아무나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 위 줄을 친 부분이 맞는 말인지를 일기 위해, 아주 간단한 소매 거래 하나를 생각해 본다.
드라이브하는 중 목이 마를 때, 목마른 사람은 길가 주유소에 가서 1불짜리 물 한 병을 산다. 만일 그 물의 값이 2불이라도 산다. 목이 많이 마르면, 10불을 주고라도 그 물을 산다. 목마른 그 사람이 물을 사는 것은 그 말과 물값의 가치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물의 가치가 물값보다 높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의 가치가 물값보다 높은 것은, 단지 “물을 마시고 싶다”라는 욕구나 기분이나 성격이나 기호 같은 것 때문만이 아니다. 시기를 놓치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고, 감기 때문에 결근하면 많은 임금을 잃는다. 물 한 병이 없어서 잃을 수 있는 임금과 그 임금을 잃을 확률을 곱하면 그 물 한 병의 가치 일부는 돈으로 계산되어 나온다.
소매상의 측면에서 보면, 물 한 병의 값이 그 물을 다시 사 오는 값보다 비싸면, 즉 이익이 있으면, 그 소매상은 그 물을 판다. 소매상의 이익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에게 시기에 전달해준 대가로 받는 보상이다. 소매 점주가 영업을 잘못하면 이익 대신 손해를 보아야 한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처지와 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다. 소매점이 물을 사 올 때의 용도는 “마진을 붙여 파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사 올 때의 소매상이 보는 가치는 소매가격보다 현저히 낮다. 같은 시각에 도매상이 보는 물의 가치는 소매상이 보는 가치보다 더욱 낮다. 한편, 소비자가 보는 물의 가치는 소매가격보다 높다.
만일 어떤 물건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그 물건의 교환은 불가능하다. 가령 같은 금액의 종이돈과 동전을 교환하면서도, 두 사람에게 그 두 가지 돈의 가치는 다르다. 자동차 바퀴에 바람을 넣을 때 동전이 있어야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동전은 같은 금액의 종이돈보다 그 가치가 높다. 한편, 주유소 점원은 동전을 바꾸어줌으로써 압축 공기를 팔아먹을 수 있으므로, 그는 돈을 바꾸는 것과 판매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시대에도 있던 교환 중에서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그 가치를 다르게 보는 가장 극단적인 예는 증권 거래다. 런던 증권거래소에 규칙이 생겨난 것은 1812년,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발표한 것은 1848년. 증권이 거래되는 이유는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각각 그 증권의 가치를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공간에 기압의 차이가 있어야 바람이 분다는 이치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하다.
이제 위에 줄 친 명제를 다시 본다. 저 말은 모든 가치를 노동의 가치로 환산하려는 공산주의 경제학과 맥이 잘 통한다. 그런데, 저러한 견해는 때때로 위에서 설명한 정도가 아닌, 무시무시한 결말을 초래한다. 팔리지 않는 물건의 가치와 팔리는 물건 가치의 차이를 모르는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그 가장 무서운 예는 지금 중국의 곳곳에서 주인 없이 비어 있는 아파트 숲이다.
과잉생산이란 결국 “만들었으나 팔리지 않는 문제”다. 필요한 것을 만들었는지 필요하지 않은 것을 만들었는지를 알려면 반드시 팔려고 내놓고 누가 사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팔아서 이익이 많다는 것은 그것이 많이 필요한 물건이었다는 증거다. 노동가치설에 매몰되어 있으면 이처럼 간단하고도 중요한 것들을 수시로 잊어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