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가시거리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가시거리

거리가 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사시는 어르신께서 대문에 Video 인터폰을 설치하시려 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필요하셨습니다. 왕복 시간과 설치하는 시간을 계산하니 거의 반나절은 걸려야 할 것 같아 조금 망설였습니다만 마음을 바로잡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하면서 문득 GPS가 나타내는 도착 시각을 보니 어느새 20여 분 후에 도착한다는 표시가 나왔습니다. 만일 내가 이 길을 출발하지 아니하였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출발하지 않았다면 내 마음속의 GPS는 그 남은 시간이 점점 자라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핑계가 많은 세상사입니다.


약속시각에 늦은 분 치고 핑계 없는 분을 아직껏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늦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면 뭔가 더 큰 잘못을 하는 듯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가시거리와 활동 영역이라는 단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활동 영역을 제한하였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작은 글씨와 먼 거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술술 읽어 내려가던 성경 말씀도 이제는 더듬거릴 수밖에 없음이 한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글자들이 선명함을 잃을 까닭은 없고 내 눈이 노화됨입니다.

그래도 성경 말씀은 대강의 윤곽으로 읽을 수 있는데 생소한 내용의 것들은 어려움이 많음을 느끼며 스스로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나 스스로 활동의 범위를 제한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스스로 활동 범위를 축소 시키면서도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 핑계 댈 대상이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길 위험이 느껴집니다.


아예 시작하지 않으려 함이 우리를 스스로 게으른 늙은이로 만드는 것 같음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의욕적 삶을 살려고 애써봅니다만 역시 옛날 같지 않음을 고백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이미 실패를 많이 해본 자로서의 경험치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 실패가 꼭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느 때가 되면 오늘 맛본 그 괴로운 실패가 좋은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실패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꽤 많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길게 보면 우리가 정말로 절망해도 되는 실패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것이 영생이라면 이 땅의 여러 가지 것들에 그렇게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단순함이라면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SIMPLE하게 살자는 다짐을 해봅니다.

마태복음 5:37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너의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우리가 겪어가고 있는 세상사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T)의 세상에서 어떤 것에 대해 옳다 아니라고 결론하기 어려운 것이 많음만은 부인할 수 없음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단순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왜 입니까. 항상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옳고 그름에 다른 사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나 타인의 이름을 걸고  옳다, 아니 오를 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성경 말씀이 항상 여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격 말씀에는 흡사하거나 다름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이 우리의 일반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이 그 말씀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이치가 말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서로 상충하지 않고 항상 우리 구조되신 야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3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시 영역도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는 데까지라고 여겨집니다.

오늘도 열어주신 귀로 듣게 하시는 영역까지 

또 보게 하시는 곳까지 열심히 평강의 신을 신고 뚜벅뚜벅 걷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기쁨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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