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산 이야기] 세인트헬렌스 정상에 오르다

전문가 칼럼

[김수영의 산 이야기] 세인트헬렌스 정상에 오르다

2017년 한해의 산행 추억을 뒤돌아보니 단연 세인트헬렌스산을 숨 가쁘게 오르던 '설박 등반'을 으뜸으로 꼽게 된다. 


1980년 5월 18일 활화산이던 이 산이 폭발했다. 당시에 시애틀과 벨뷰 지역까지 도로에 수북이 쌓인 잿가루를 보며 가히 엄청난 화산의 위력에 두려움을 느끼게 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그 정상을 밟았다는 것은 개인적인 산행 경력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폭발 전 높이가 2,950m이던 세인트헬렌스의 북쪽 봉우리가 휭하니 날아가 버려 지금은 2,550m로 코가 낮아진 모습이 신기롭게만 느껴졌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북한의 백두산(2,744m)이나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1,950m)과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을 한꺼번에 등반하고 온 기분이 들어 프로 산악인이나 된 양 풋풋한 자긍심이 생기기도 한다.


떠나기 전인 금요일에 처음 오르는 고산등반에 설렘과 긴장으로 잠을 설치고서는 드디어 세인트헬렌스의 중간 지점쯤인 4,800피트 높이에서 모두 짐을 내리고 설박 준비를 하던 중 나는 영문도 모르게 기운이 없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꾀병처럼 보이긴 하지만 우선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이유가 생겨서 안도의 숨이 쉬어지기도 하였는데, 그만 대원 중 한 분이 가지고 온 쌀밥 덩어리로 흰죽을 만들어 먹여주는 바람에 언제 아팠는가 할 정도로 기운을 차리게 됐다.


새벽 4시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기상,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5시 30분에 여명을 안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 둘째 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아침을 밝히는 가느다란 빛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초입에서는 보이지도 않던 하얀 산들이 넘고 나면 계속 나타나는 것이었다.


가슴 속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두만강 푸른 물에...' 가사도 모르는 오래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를 보고 대원들은 마냥 여유로워 보였다는 뒷얘기도 듣게 되었다.


그날 강력한 팀 리더의 한 수 즉, 20 발걸음에 3초 쉬기 테크닉이 아니었더라면 반나절에 가득 고도 4,000피트인 일직선의 사다리 같은 눈산 길을 오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발 한발 기를 담아 딛고 오르다 보니 드디어 발아래로 침묵하고 있는 분화구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야호! 소리가 절로 나는 하산길은 일직선으로 내려꽂혀지는 미끄럼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고, 날씨마저 신이 준 선물처럼 청명하고 뽀득이는 하얀 날이었던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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