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원 기드온칼럼] "고난을 이겨낸 고려인 디아스포라"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사명(5) - "고난을 이겨낸 고려인 디아스포라"
연해주의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강제 추방당했다. 1937년 8월 21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고려인이 일본의 간첩 활동을 할 것이라는 명분으로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결의한다. 그리고 스탈린은 강제 추방 전 소련 사회 지식인층에서 2,500명 이상의 한인들을 숙청한다. 이는 소련 사회에서 한인들이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굶주림과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 연해주 초기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가 만들어지자마자 민족학교를 세운다. 그래서 1920년대 연해주의 한인 초중등 교육기관은 344개에 이르렀고 학생 수는 25,000명이 넘게 되었다. 그리고 사범대학교가 개교되었고, 7개의 우리말 신문, 8개의 우리말 잡지가 발간되었다. 1932년에는 고려 극단이 창단되었고, 한국어 라디오 방송국이 개국한다.
1930년대 연해주 한인들의 교육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문화를 즐기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들은 재산을 정리할 시간도 얻지 못한 채 꼬박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2만 킬로미터 넘는 먼 곳에 버려진 것이다. 당시 스탈린에게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카자흐스탄에 20,170가구 총 95,256명,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 16,272가구 총 76,525명, 모두 171,781명의 한인이 강제로 추방되었다.
한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1만 1천 명 이상이 죽었다. 기차 한 칸에 평균 4가족, 20여 명이 실렸는데 불규칙하게 정차해서 기차 안에서 출산하는 이들이 있었고, 열악한 환경으로 유아 사망률은 높았다고 한다. 달리는 기차에서 장례를 치를 수 없어 시신을 기차 밖으로 내던지기도 했단다. 참으로 끔찍한 고난이다. 10월에 출발하여 한겨울에 도착한 한인들은 현지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거처를 구하지 못한 한인들은 땅굴을 파고 그 안에 어린 유아와 약한 이들을 두고 그 주변을 젊은 장정들이 스크랩을 짜 온기를 만들어 중앙아시아의 매서운 추위와 싸워 생존했다.
이런 역경에서도 고려인들은 구소련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고 잘 사는 소수민족으로 우뚝 일어선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으로 수백만의 사람이 죽고 수십만이 국외로 떠나, 거의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버려진 허허벌판 동토의 땅은 황무지였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그 동토의 땅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든다. 볍씨를 개발하고 수로를 만들어 마침내 1Ha 수확량 15톤 세계 기록의 기적을 일구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