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참된 이웃
<오늘의 양식>에서 읽은 예화를 소개한다.
한 괴짜(?) 노인이 미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이 노인은 늘 기름통과 간단한 연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어느 집이든 상관하지 않고 문이 잘 맞지 않아 삐걱대거나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으면 기름을 치고 간단히 손을 봐주었다.
더 이상 문이 삐걱거리지 않고 문이 잘 단 히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돈벌이를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료로 서비스해 주는 것이다. 이 노인은 부자도 아니고 기술이 특출한 것도 아니다. 또 몸이 건강한 편도 아니고 교회나 어느 봉사단체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근처 도시에서는 이 노인을 착하고 참된 이웃 노인이라고 불렀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이 살 만하고 훈훈한 삶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소
문을 내거나 떠들썩하게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이웃을 위해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참된 이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복음 10장 29절을 보면 유대교의 유명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참된 이웃의 정의를 깨닫게 하셨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대개의 경우 제자들의 질문이나 대중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 대신에 비유로 대답을 하거나 설명하셨다. 한 여행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났다. 폭행을 당하여 길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고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
그런데 마침 유대교의 한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그를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레 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지만 그 역시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그들은 강도를 만나 매를 맞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여행자를 목격했지만 못 본 체 그냥 지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죽어가는 여행자를 보았다. 그는 여행자에게 다가가서 우선 다친 곳을 포도주와 기름으로 치료를 했다. 그리고 그를 여관에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해 줬다. 다음날 아침에 사마리아인은 길을 떠나면서 여관 주인에게 부상한 여행자가 다 나을 때까지 치료해 주도록 부탁하고 비용을 지불했다.
여관 주인에게 만약 치료비가 모자라면 돌아오는 길에 꼭 깊겠다는 약속을 하고 치료를 끝내도록 단단히 부탁하고 떠났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물으셨다. 그리고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되물으셨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개입시킴으로써 자신의 관점이나 정의를 직접 내리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되묻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줌으로써 그가 강도 만난 사람의 새로운 이웃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인종이나 계급을 따지지 않는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로부터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무시당하고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은 제사장이나 위풍당당한 레위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웃에게 진정한 사랑과 온정을 베푸는 것은 사회적인 지위나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진실한 사랑과 구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가난하고 진실한 사람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외당한 사마리아인을 학식이 많고 거만한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보다 더 사랑하셨고 진정한 이웃으로 여기셨다.
사랑을 베풀고 진정한 이웃으로 평생을 살다 간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명성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고 할 수만 있으면 이웃을 살피고 돌보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테레사 수녀이다. 그녀는 몽당연필 두 개와 허름한 옷 한 벌, 그리고 남루한 신 한 켤레만 남기고 하늘나라로 갔다.
노벨평화상을 사양하다가 그 상금으로 불쌍한 이웃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락했고, 그 전액을 빈민 구제에 투척했다. 조선시대 말에 우리나라에 복음의 씨를 뿌린 이수정 씨도 사욕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당시 민비가 그에게 소원을 물있을 때 그는 벼슬도 원하지 않았고 재물도 원하지 않았다. 복음의 씨를 내리기 위한 선교사 초청만을 기도하고 원했다.
우리나라 초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올 수 있도록 뒤에서 주선한 사람이 바로 이수정이란 분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도록 교량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해, 또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다 내어놓고 목숨까지도 그것을 위해 희생하는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이런 이웃이 있는가?
나는 진정한 이웃인가? 한 번 반성해 볼 일이다. 신앙도 봉사도 모두 내 명예와 지위를 위해 하는 것은 아닌지 진정으로 반성해 보자. 우리는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고 케네디 대통령의 말처럼 "미국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미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질병과 가난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정말로 가까운 이웃이었다. 예수님의 짧은 일생 자체가 이 땅에서 참된 이웃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곧 예수님 자체의 일부분을 보여 준 것이다. 그분은 강도 만난 여행자와 같은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다 북한 용천역 폭발 사고로 어린 생명들이 무더기로 목숨을 잃었고 부상을 입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민족으로서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사랑의 손길을 보내서 참된 이웃으로 도와주었다. 성금과 구호물자가 그들에게 직접 전달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우리는 진정한 이웃으로 도왔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수많은 독거(배로)노인, 소년소녀 가장 결식(아동 끼니를 거르는) 영세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에게 참된 이웃이 필요하다.
이들은 우리의 온정과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대가나 이해관계를 떠나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나 자신이 안락과 편안함을 누리며 이웃을 외면하는 사이에 우리의 이웃은 하나씩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하루에 3만 5천 명의 생명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고 구제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참된 이웃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