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회계사] 신 대서양헌장과 중국 13 (항미원조 2)

전문가 칼럼

[안상목회계사] 신 대서양헌장과 중국 13 (항미원조 2)

항미원조(抗美援朝)란, 한국전쟁에서 본토 중국이 미국의 침공을 막아 조선을 도왔다 하는 뜻이다. 칼럼 790호에서 본토 중국 헌법 속에 있는 그것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다. 항미원조라는 표현 자체가  한국전쟁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엉뚱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전쟁을 시작한 쪽은 미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영화도 나오고 장편 드라마도 나오고 하지만, 막상 중국 외교부 사이트의 영문 설명은 항미원조라는 단어만큼이나 괴상하고, 또 허술하다.


항미원조 중국의 주장: https://blog.naver.com/samahncpa/223091135838


중국 외교부의ㅏ 설명은 한반도를 두 개로 봤다가 한 개로 봤다가 오락가락하며, 전쟁의 시작일은 1950.6.25일이리고 명시해 놓고는 그날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침공했지에 관해서는 글 전체를 통하여 모호하다. (한국전쟁 직전에는 작은 규모의 상호 침공이 있었지만, 6월 25일 그날의 침공자는 북한이었다.) 미군의 남한 파병을 한반도 침략이라고 했다가, 이어서 주은래가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좌시하지 않고 개입할 것”임을 경고했다고 한다. 


처음 파병이 참략이라면 그 때는 중국이 왜 가만히 있었으며, 처음 파병이 침략이라면 38선 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주은래가 그러한 경고를 한 날짜는 1950년 9월 30일이라 해 놓고서는, 바로 이어서 “미국은 그 경고를 듣지 않고 9월 15일 인천상륙을 감행했다”고 한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가? 


앞 문단에는 논리 측면에도 문제가 있고, 사실 측면에도 문제가 있다. 미국 외교부는 미군이 10월 7일부로 38선을 넘어 북진했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한국군이 38선을 넘은 것은 10월 1일(국군의 날)이며, 그 한국군의 지휘관은 미군의 워커(Walker) 중장이었다. (이승만의 결정에 의하여, 한국군 지휘권은 미군에 넘어가 있였다.) 미군은 10월 9일날 38선을 넘어 들어갔다. 


따라서, 미국이 38선을 넘은 시점은 군 지휘권을 기준으로 하면 10월 1일이고 장병의 국적을 기준으로 하면 10월 9일이다. 일반적으로, 쓰고 싶지 않은 글을 강제로 썼을 때 저런 글이 나온다. 쓰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받아, 좀더 공정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위 줄친 부분은 사실이다. 그 사실의 의미를 캐자면, 한국전쟁을 두 쪽으로 쪼개놓고 볼 필요가 있다. 제1차 한국전쟁은 1950년 9월 28일까지. 제2차 한국전쟁은 그로부터 3일 뒤인 10월 1일부터. 이렇게 쪼개는 것이 가능한 것은, 9.28 서울수복 직후에 거기서 전쟁을 끝내자는 의견이 오고갔기 때문이다. 두 개의 한국전쟁 사이의 9월 29일과 30일. 


긴 역사 속에서 그 이틀은 순간처럼 보이지만, 현미경를 들고 들여다보면 그것은 꽤 긴 시간이었다. 전쟁을 거기서 끝내야 하느냐 더 해야 하느냐를 두고 바쁜 토론과 살 떨리는 고민이 한만도와 미국 사이에 오고갔기 때문이다. 전쟁을 시작한 쪽은 북한이었으므로, 유엔군은 거기서 전쟁을 끝낼 명분도 전쟁을 계속할 명분도 가지고 있었다. 남은 일은 승산의 계산이었다.


유엔군은 주은래의 경고를 그 계산 속에 집어넣지 않았고, 그러한 계산의 주역은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고, 설혹 참전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으므로, 맥아더는 제2한국전쟁 실패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판단착오를 억지로 만회하기 위해 원자탄 26개를 사용하는 확전을 주장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트로만 대통령에게 파면 당해 버렸다. 이 이야기에서 미국의 문제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작전 실패의 문제일 뿐 “침략”이라는 국제법적 문제가 아니다. 침략은 미국이 한 것이 아니라 공산진영이 한 것이다. 


항미원조에서 중국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하는 도덕적 우월성이다. 손자병법에 의거, 민심을 얻는 것은 승리의 방책이기도 헸다. 중국은 제2 한국전젱애서 맥아더의 뜻을 꺾었다는 점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자랑은 그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그 이유는 많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본토 중국이 당시의 적이었던 유엔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원한이 남아 있었다면 유엔 가입은 기만이었으며, 진심을 가지고 유엔에 가입했다면 과거를 덮고 복수심을 버려야 떳떳해진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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