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원 기드온칼럼]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사명(4)-연해주 한인마을 '신한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19,20)"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경험한다. 하지만 1910년 나라를 잃고 1938년 일본의 강압적 탄합으로 신사참배 결의안을 결의하는 아픔을 겪는다. 신사참배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신사참배 결의안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들을 처벌하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규정했지만, 실상은 일본 천황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우상숭배였고 배교행위였다. 결국 복음은 변질되었고 한국교회는 복음의 기근을 경험한다.
다행히 1860년대와 1870년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초기 이민자들은 조선 밖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1658년 만주족의 발원지를 성지화하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 중국 동북 지역에 만주족 외에는 다른 민족이 거주할 수 없게 '봉금정책'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한족(漢族)의 이주를 막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조선인의 침입을 막아왔다. 그런데 1875년 청조는 길림정 동남부 지역에 '봉금정책'을 해지한다. 그리고 1882년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봉금을 해제한다. 이는 1860년대부터 만주 지역에 잠입해 농토를 개간해온 조선인들을 공식적으로 묵인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런 변화에 따라 조선은 1883년 도문강(대동강) 월강금지령을 철폐한다. 1858년, 러시아는 아편전쟁으로 약화된 청에 '아이훈조약'을 맺음으로 부동항 연해주를 얻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급기야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북경조약'을 맺어야 할 청조를 도와 이를 성사시켜 줌으로 연해주를 얻는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초기 이민자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중국 만주 지역으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게 되는데, 훗날 이들이 조선인으로서 중국과 러시아 국적을 얻는 배경을 제공해 준다.
연해주 한인 마을, 신한촌
고려인(카레이스키)은 1991년 구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국가들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 국가에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이 포함된다. 약 50만 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거주한다. 이들의 조상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다.
언제부터 연해주에 한인이 거주했었는지 정확치 않다. 다만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조선 땅에 기근, 홍수, 자연재해가 빈번했는데 이때 생존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농토를 개간했던 조선인들이 비옥한 땅을 찾아 점차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1860년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얻어 부동항 획득에 성공하는데, 그 이후 1863년 국경 감시소 책임자가 연해주 군 총독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빈곤, 굶주림, 착취를 피해 한인 13가구가 비밀리에 들어와서 농사를 짓고 있고 이들이 정착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다.
또 다른 자료를 보면, 1864년 남녀 60명으로 구성된 14가구가 지신허강에 정착하여 한인 마을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약간의 연대 차이는 있지만, 1863년 혹은 1864년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안중근 의사와 의병장 유인석, 홍법도가 연해주로 망명한다. 이들은 1908년 전후 최재형 등과 연합하여 의병단(義兵團)을 정비, 1910년 5월 13도의군을 편성하여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한다. 이어 1907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 이위종 등이 국내로 들어갈 수 없어 연해주에 정착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1911년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 설립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주한 일반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점점 한인들의 규모는 커져갔다. 당시 연해주 신한촌은 조선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기지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다. 그 예로, 1908년 4월 연해주 연추에서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이위종, 엄인섭을 중심으로 '동의회'가 결성된다. 동의회는 대한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비중을 두어 활동했다.
동의회 회원이었던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할 때,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대부라 불리는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암살 작전을 도왔고, 그가 붙잡힌 후에도 러시아인 변호사를 직접 준비해 안중근 의사의 석방을 도왔다. 그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가족까지 보살폈다. 1919년 2월 연해주에서 임시정부를 선언한다. 그리고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운동 이후, 3월 17일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임정이 수립된다. 이후 같은 해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에서도 한성정부가 수립되면서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때 대한국민회는 상해 임시정부에 편입되면서 9월 11일 상해를 거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하기 전 이곳에 거주한 고려인들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최소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20년 4월 일본은 독립군색출 작전이란 명목으로 신한촌을 급습한다. 이에 다수의 한인이 참변을 당했다. 이때 최재형 선생도 살해당한다. 안타깝게도 이후 항일투쟁 주 무대는 중국으로 옮겨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