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형제들아 너희는 나를 본받아라
“형제들아 너희는 나를 본받아라.”
빌립보서 3장 17절 말씀입니다.
얼핏보면 그의 교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신성불가침 조약을 어긴 것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우리를 향한 도발이 우리에게 도전됨은 어쩐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그의 삶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을 통하여 그의 삶을 알 수 있습니까.
왜곡될 수도 있는 역사적 기록이나 기사를 통하여가 아니라,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이미 그의 속내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직 주 안에서 말하고 행함에서, 우리는 그의 한결같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서는 불경건에 대한 대쪽같음과 어린 자들에 대한 한없는 유연함이 느껴집니다.
흔히 말하는 외유내강을 넘어선 어떤 온전함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온전함이란 무엇입니까.
완전함이 주는 만족함이나 충족감과는 다른 아름다움마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그것이 온전함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삶에서 완전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온전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완전하다고 하면 왠지 능력 위주라고 하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황금 만능주의적 사고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온전함은 어떠합니까.
그 완전을 향하는 수단과 방법이 결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모든 수단과 방법까지 포함된 완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으로서 온전에 스스로 도달한다는 것은 오직 불가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아름다운 이름인 예수님께 접 붙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이 오직 예수님께 접 붙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필리핀에 있는 세계 최대 개방형 교도소인 이와힉에 갇힌 한 죄수가 레몬나무를 특이한 방식으로 번식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존에 있는 가지의 적당한 부분의 껍질을 도려내고 거기에 흙을 반죽하여 잘 감싸주면 그 부분에서 새로운 뿌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것을 분리하면 또 한 그루의 레몬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접 붙은 우리가 작은 예수로 새롭게 태어남 같음이라 여겨지지 않습니까.
새로 남, 즉 BORN AGAIN입니다.
접붙는다는 것은 일말의 간격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의심도 의문도 어떤 회의도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체됨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 나를 본받으라 하는 것은 너희도 예수님을 본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걸어온 발자취가 그 사실을 표현한다고 느껴집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소명에 꽉 찬 생애를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한마디로 매일 새롭게 도전하는 전투이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도전이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삶에 어떠한 파업도 용납할 수 없는 삶의 행적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본받아 산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회심의 본을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매우 솔직함을 한 자였습니다.
오늘날 어떤 목사는 대통령의 취임식장에서 기도를 마치며 “ 다양한 신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멘”이라고 화답하였습니다.
삯꾼 목자와 사이비 신자의 모습들이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만일 그 모습을 바울이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말할지 전혀 의심스럽지도 않습니다.
바울에게 예수주의는 신념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도 책망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주의를 뺀다면 아무런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명료한 배타적 신앙인의 품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이냐 김일성 주의를 부르짖지만, 그것은 본인의 부족을 메꿔보려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의는 곧 여호와 하나님 주의이기 때문에 스스로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허물이 크고 부족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주의가 될 때에만 온전하여지는 것을 바울이 지금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도 바울처럼 작은 예수의 길을 이어 걸어감을 허락받는 날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