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나의 침묵, 나의 투쟁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나의 침묵, 나의 투쟁

수많은 데모의 군중이 있습니다.

이념이 다른 무리가 자신들이 화났다고, 너희가 틀렸다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끼리의 다툼이 외세로 향할 때는 같은 목소리를 내곤 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군자는 정의를 표준으로 이해하고, 소인은 이익을 표준하여 이해한다는 논어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격려를 받을 때도 있고, 격려할 때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병치레를 할 때도 있고, 병구완할 때도 있음입니다.


때로는 안주할 때도 있고, 박차고 일어날 때도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공자께서 말씀하신 중용이 슬기로 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 슬기로움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인생에는 그리 슬퍼할 것도, 무척 좋아할 것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면서 사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인생학]이라는 학문은 없는 것입니까.


인생 경영학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경영에는 성공과 실패를 논할 수밖에 없고 또다시 성공과 실패의 정의에 몰두할 수밖에 없어서 크게 흥미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봄을 맞이하여 만개한 벚꽃을 성공이라고만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솔직해지면 우리의 인생학이란 신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우리 뜻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 위에 계신 존재, 즉 타자성을 인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타자성은 우리의 인정이나 이해를 요구하지 않음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영화로움처럼입니다.

물론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타자인 것처럼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한결같은 결론에 이르지 못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만 한결같으시고,여일하시고, 변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로우시고,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갈대야 우르를 떠나는 데라, 이브람, 롯의 인생은 다 따로따로임을 우리가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데라는 하란까지이고, 이브람은 가나안 땅이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브람의 생애, 

이삭의 생애,

야곱의 생애

이들의 생애를 우리는 속속들이 다 안다고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기록된 것만 숙지하면서도 그들을 다 안다고 여기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작은아들의 모습만을 아는 자가 어찌 돌아온 탕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본 것처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변화되었다는 사람과 다시 만나 그에게서 변화된 모습을 찾아보려 했습니다만 무엇이 변화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음을  우리는 쉽게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이성을 깨우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변화될 수 없음입니다.


돌아온 탕아의 삶은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알 수 없음입니다.

사울 왕은 수시로 돌아온 탕아였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음입니다.

자신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받은 히스기아 왕도 후손의 삶을 위하여는 기도 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아에게 손뼉 칠 일도, 큰아들의 냉랭함을 비난할 자격을 우리는 갖추고 있지 못함입니다.


우리는 그저 잠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침묵이 모략임을 새삼 떠올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이 일하심임을 우리는 언제나 알게 되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권세를 잡은 무리가 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그 권세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인간은 그저 이 땅에서 자기를 어떻게든지 남에게 좋게 보이려 노력하다가 그 생을 마감하는 것임만 같습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인생은 무대 위의 한 편의 연극이다”라는 말이 우리에게 명언으로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받음을 허락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랑하심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알게 될 때 드디어 참으로 눈물이 풍성한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의 침묵을 본받는 *나의 침묵기*에 이르게 됨인 것 같습니다.

나의 투쟁이 아니라 나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선하시고 옳으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침묵은 너무 소리가 커서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왜 속한 응답을 주지 아니하시느냐고 항변할 때도 단지 우리가 듣지 못했을 뿐이라고 알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고 보면 부부 사이에서도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며 서로 나무라는 것이 자주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친절히 말씀하셨음에도 우리의 귀가 어두워졌음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원이 무엇이면 좋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투쟁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침묵을 배워

우리도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자 되길 예수님 이름으로 간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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