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인터넷이 없는 삶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인터넷이 없는 삶

새벽녘에 갑자기 쾅쾅거리는 소리가 동네 어귀에서 나더니 모뎀이 번쩍거리고 인터넷이 끊어져 버렸습니다.그러더니 한 10분 후에 인터넷 회사로부터 9시 30분까지는 온 힘을 다하여 코치겠다는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거의 24시간이 지나서야 개통이 되었습니다.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편이 누군가를 향하여 불평을 하게 하였습니다.


우선 전해야 하는 카톡을 하기 위해 멀리 다른 동네에 있는 커피숍까지 가야 했습니다.

가는 길에 벌써 도로를 막고 수리하고 있는 인터넷 회사 차들과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요즘은 예년과 다른 강추위인데 그 높은 곳에서 일하려면 어려움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며 불평하던 마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옛적 인터넷이 없을 때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일상사가 인터넷에 엮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 통화도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녁 시간에 TV를 켰는데 역시 ONLINE을 요구하고 있어 볼 수 없었습니다.


평상시 별생각 없이 누리던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였습니다.

새로운 문물이 나오면 처음에는 신기해하지만, 곧 익숙하여지는 것이 우리네입니다.

처음의 고마운 것도 금방 잊고 되지 않을 때 금방 불평을 쏟아낼 뿐입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 처음 사랑,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등등의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인터넷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 봄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옛적에도 크게 불편 느끼지 않으면서 또 거기에 잘 적응하면서 살 수 있었던 우리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감사를 더 크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이 이 땅에 있었을 그때 그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살았기에 기꺼이 유무상통할 수 있었겠습니까.


회개를 하며 감사함을 체험한 사람이 가장 먼저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나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의 어려움을 보는 안목을 가지게 됨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사도행전 20:35의 말씀이 <레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행위 되지 않으면 사랑은 그저 끔찍한 에고(EGOISM)에 빠질 따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병든 자, 가난한 자에 더불어 외로운 자, 고독한 자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외롭게 죽는 것은 죽는 자에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은 어차피 외롭고 고독한 것이라고도 여겨집니다.


단지 복된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무도 경험할 수 없지만 죽음 후의 장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죽음 후의 장래가 없다면 오늘의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오늘 오전에 우연히 부모님의 장지가 있는 곳을 지나다가 들렸는데 그곳에서 묘지를 찾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곳에서는 길치인 제가 가장 애용하는 GPS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소가 특별히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주 찾아가지 않다 보니 기억을 더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생존하셨을 때에 가이없는 은혜를 입었지만, 막상 돌아가시자 소홀해짐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교에서는 조상을 숭배까지 하는데 우리는 숭배가 아니라 소홀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한 곳에 묻혀있고 그의 후손들이 서로 싸우면서까지 애써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믿음을 계승하려는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숭배가 아니라 기념하고 기억하며 믿음을 계승하는 것은 귀하고 귀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장지는 참으로 조용했습니다.

외롭다, 괴롭다, 귀찮다, 나쁘다, 미안하다, 감사하다, 사랑한다, 바쁘다 등등 아무런 아우성도 당연히 더 들려오지 않고 새로운 장지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오가는 이들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저 전망이 좋고 하늘은 푸르고, 선샤인만이 그렇게 기분 좋은 맑음을 표현하고 또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영원토록 그리할 것 같음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장례 시에는 그렇게 슬퍼함, 추모함이 넘쳐났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잊을 수밖에 없음이 하늘의 은총이라고도 느껴집니다.


찰나(刹那-75분의 1초) 같음입니다.

그러면서 이 땅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숙연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살아 있을 때 열심히 하자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성도가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빠지지 않고 교회 예배에 출석하고, 말씀 목상을 게을리하지 않고, 기도를 쉬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거기에 이웃과 함께함, 즉 더불어 삶이 없다면 부끄러울 따름이라 여겨집니다.

교제에도 친밀함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일치됨 같은 친밀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 됨입니다. 

요즈음은 이웃에 사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기 어려운 시절을 살며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층간 소음이 전혀 이해되지 못하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 알면 이해할 수 있음에도 알려 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으려 하는 것이 이 세태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 대가 자기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특성으로 발전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고 그래서 사랑스러워지는 세대가 지금이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온라인이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엮어놓았지만, 더 고립되게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혼자서, 개별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여겨집니다.

ONLINE이 ONE LINE 됨을 기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독립적 개별적 삶이 존중되는 더불어 삶이 귀하게 여겨지는 날입니다.

아무리 문명과 과학이 발전, 발달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서로 모르게 하는 것이라면 저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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