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나칼럼] 인공관절 수술 후(1)

전문가 칼럼

[레지나칼럼] 인공관절 수술 후(1)

2025년 6/10일, 5년 동안 고통을 받던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그동안 되도록이면 수술을 받지 않으려고 했었고, 수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치료해 보려고 했었다.


그 방법 중 한 가지인 줄기세포 치료 시술(아직 FDA 승인이 나 있지 않아서 시술이라고 하는데)은 보험 처리가 안 되니 현금을 지불해야 하기도 하니, 여러 가지 신중하게 생각하면서도 무릎이 너무 아파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너무 많아 일단은 줄기세포 치료와 곁다른 여러 가지 시술을 함께 받았다.


줄기세포 치료는 아직 보험 처리가 안 되니 일단 엄청난 금액이 요구된다.

무릎 한쪽에 $6,500불부터 $10,000불가량이 든다.

그리고 줄기세포 치료가 아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서 좋은 의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다양한 루트를 통하여 캘리포니아에서 86년도부터 줄기세포 시술을 하고 있는 의사를 찾아서 우선 더 아픈 오른쪽 무릎에 줄기세포 시술을 받았는데, 이 치료의 약점은 일단 수술하면 많이 움직이면 안 된다.

피에서 뽑아낸 줄기세포가 몸 안(무릎에 들어가)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라는데, 그래서 줄기세포 치료 기간엔 전혀 운동을 하지 못하니 무릎 관절이 아프기 때문에 운동을 통해서 근육을 키워주어야 하는데 문제에 봉착했다.


줄기세포 치료 이후로 무릎을 ‘공주 다루듯이’ 살살 사용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허벅지와 종아리, 다리의 모든 근육들이 위축되기 시작하니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줄기세포를 주입한 무릎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해 계속 얼음찜질을 해주어야 한다. 줄기세포 시술 후, 의사의 처방에 따라 줄기세포가 활동적으로 안착하게 하기 위하여 PRP 치료를 받는데, 보통 4번을 권유하는데 한 번 맞을 때마다 비용이 700불에서 1,500불가량 든다.


시애틀에서 치료를 했으면 매번 시술을 받을 때마다 캘리포니아로 가야 하는 번거로움과 비행기 값, 또 그에 따른 부수 비용을 조금 더 아낄 수 있었는데 이미 판은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터라 매달 두 주 간격으로 8번의 캘리포니아 방문을 해야 했다.


감사한 것은 회사에서 나의 치료를 100% 서포트하면서 일주일에 3일만 출근을 하게 하고, 목요일부터는 집에서 근무하는 스케줄로 해주어서 그나마 컴퓨터만 갖고 있으면 어디서든 일이 가능했다. 한 달에 두 번 수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밤늦게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목요일 아침 시술을 받고, 이틀쯤 통증 때문에 깊은 잠에 빠지고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는 일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다시 시애틀로 돌아오는 스케줄을 1년간 했다.


줄기세포 치료 후에 따른 PRP 시술(혈소판을 풍부하게 자기 몸에서 혈청을 뽑아서 삽입해 주는 시술)도 함께였다. 망가진 무릎 관절과 찢어진 슬개골을 제거하고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로, 수술 시간은 3시간이었는데 수술 후 걸어 다닐 정도까지 가려면 매주 3번씩의 물리치료와 더불어 수술 후 부어 있는 다리 붓기 제거, 무릎 구부리기, 무릎 펴기 등을 끊임없이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수술하고 8주가 지났다.

이제 어느 정도 걷는데, 이미 수술받느라 상처가 난 오른쪽 무릎과 허벅지, 종아리 등은 나의 통통한 다리 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아주 날씬한 다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무릎의 통증은 아직도 10에서 4.5 정도이다.


설상가상으로 마약 성분의 진통제 부작용이 있어서 8주 안에 응급실로 두 번이나 실려 갔기에, 수술 후 한 달 만에 조제해 준 마약성 진통제 복용을 끊어버리고 쉽게 살 수 있는 타이레놀로 교체하니, 진통 효과가 심하게 필요한 무릎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통증을 호소하였다.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 농구부에서 맹활약을 했다.

5학년 때 키가 보통 아이들보다 커서 농구 선생님의 격려에 농구부에 들어서 6학년 전국체전까지 나가서 우리 학교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데 큰 힘이 되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내 키는 성장을 멈추어 중학교에 들어가니 158에서 더 자라지 않고, 중학교에 들어가니 농구하는 애들이 워낙에 키가 크다 보니 주전이 안 되


고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미련 없이 농구부를 떠나 지금은 세상을 떠난 윤석화(영화배우) 선배의 꼬드김에 무용과에 들어갔는데, 무용하는 애들은 어려서부터 하던 애들이라 너무나 잘하여서 ‘여기서 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무용반에 들어가서도 지독하게 연습하는 연습벌레가 되었었다.


방과 후에 거의 매일 연습을 하고도 모자라 학교가 문 닫은 토요일 오후까지도 남아서 높이 점프하기, 멀리 다리 펼치고 사뿐히 안착하기 등을 하다 나중에는 피곤해 지쳐서 쓰러질 정도로 하게 되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아무래도 내 실력으로 무용을 전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결론과 엄마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이미 무용과 농구로 다져진 나의 작은 키는 위로 커지지 않고 그대로 멈추고, 애꿎은 다리만 알통이 배겨서 그때부터 치마를 선호하지 않게 되었었다. 친구들 다리는 치마를 입으면 쭉쭉 뻗어서 치마 입은 모습이 아주 예뻤는데, 운동으로 다져진 나의 종아리는 무용으로 생긴 계란보다 더 큰 알통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으니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부끄러움에 친구들이 남학생을 만나러 가자고 해도 절대로 끼지 않았다.


그리고 4명의 남자 오빠들 사이에서 나는 톰보이가 되어 있었고, 이성적으로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어쩌면 툭 튀어나온 종아리 근육을 바라보며 은근히 몸매에 자신도 없어졌던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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