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사라의 삶을 통하여 배우는 믿음 레슨 (2) 말씀이 뿌리내린 삶
믿음에 있어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에 보면, 말씀을 행하는 삶에 대하여 이렇게 권면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약 1:21-2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 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 속에 심기어진 그 분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삶에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 열매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말씀이 심기어지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말씀으로의 부르심 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도 저항할 수 없는 그분의 말씀이 약속으로 주어질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이 더디 응답되는 그 긴 기다림 속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약속의 말씀이 반복해서 그들의 삶을 이끌어 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의 자손이 생기기 전 창세기 17장과 18장을 보면, 아주 재미난 두 개의 에피소드가 소개됩니다.
약속을 받은 지 어언 20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조용히 그들의 일상을 누리며 살아갈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또 그들을 찾아 오십니다.
마치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신 듯, 마치 이제서야 그 약속의 때가 다 되었다 말씀하시는 것처럼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 사람이 보인 반응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마음속으로 웃습니다.
창 17: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그들은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웃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사라의 이 모습을 믿음의 모습으로 여겨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약속 하신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믿었기에 잉태할 힘을 얻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내용을 해석해 주고 있는 바울의 로마서를 보면 바로 이 대목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지는 순간인 것을 보게 됩니다.
“롬 4:19-22)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과연 히브리서와 로마서가 이 사건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이 심중에 이르러”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드러내 놓고 웃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게 말이 됩니까!
이제 제 나이가 백세 입니다!
하나님, 제 태가 죽은 것을 모르세요!
그들은 하나님께 냉소적으로 신경질적으로 반응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현실을 부정 하며 자라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할렐루야, 아멘! 그렇게 될 줄을 믿습니다!
반응 했다면, 우리는 이 두 사람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데 있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 내게도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과 이미 닫혀버린 자신의 태를 부정할 수 없었기에 웃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런 모습을 책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여겨주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의 이런 모습을 믿음으로 받으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믿음의 레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어떻게 우리 속에 심기어진 말씀과 더불어 성도의 삶을 이끄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그 말씀 속에 그 분의 뜻과 마음이 녹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말씀과 연합하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이 설득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것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전심으로 아멘 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심중에 웃음만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심기어진 말씀 이 믿음과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알고 있는 데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능력 없는 자신을 부정하고 부인하며 마치 자신들에게 능력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힘 없고 능력 없는 나를 인정하나 그런 나를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그런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 부인할 수 없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말씀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표현을 다시 한번 보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 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그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능력 없음을 인정하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이 말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꼭 초인적인 방법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님을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넌 도대체 왜 믿지 못하냐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을 우리 속에 깊이 깊이 심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그 말씀 안에서 역사하도록 때를 조정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왜 우리의 삶 속에 예배가 능력이고 진정 축복일까요?
예배란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과의 복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속에는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 으로 듣겠다는 나의 진지한 고민이 담겨있는 것이고, 또한 그 말씀이 내게 선포 될 때에 나는 그 말씀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전심의 결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결단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왠지 하나님 앞에 생명 내어 놓고 예배 드리던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이 부러운 요즘 입니다.
이번 주 드려지는 여러분의 예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 깊이 심기어지는 복된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