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인생에서 가장 큰 상급은 무엇입니까?
시편 제 23편의 절정은 무엇이라고 여겨집니까.
5절 말씀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원수의 목전에서 받는 잔치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잔치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는 원수로서도 어쩔 수 없이 맛보게 되는 절망감의 크기만큼, 아니 그 이상의 짜릿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승리라도 누구에게 이기는가 하는 것은 매우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과의 축구 경기에서 우리가 자주 느끼는 그러한 감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이 가장 큰 상급이라면 좀 밋밋함, 씁쓸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존재감이 작아짐을 느끼게 됨은 왜 이겠습니까.
좀 속되고, 다르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입니다.
원수만이 우리의 경쟁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만 이긴다고 세계적 일 수 는 없음이기 때문입니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도 연상됩니다.
선의와 경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수 없는 것 같음도 느껴지기는 합니다.
경쟁함에 있어서 선의는 능력이라고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능력에 대한 정의도 여러 가지 일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습니다. 요즘은 반칙도 모방이나 컨닝처럼 일종의 능력으로 간주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상을 승리자에게만 주는 것은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법꾸라지라는 말도 성행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상에만 집착하며 살지 말자는 생각은 오만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해탈과 포기는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해탈이란 뜬 구름 잡는 행위 같고, 포기는 현실적 언어같이 느껴짐도 있습니다.
번뇌가 없다는 것과 죽음이라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죽음은 번뇌로부터 온전하게 벗어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말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에는 호흡이 없음이라는 징후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음입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반드시 불행일 필요는 없다고 여겨짐입니다.
번뇌가 삶의 이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견딜 이유가 되는 것처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호흡이 있으면서 해탈함은 가능하다고 여겨집니까.
진정한 해탈은 무엇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코람데오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것이 해탈의 영역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능력과는 무관한 일이라 여겨지지 않습니까.
해탈된 삶이 진정한 삶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이 순간 십자가의 승리가 떠오름은 왜입니까.
십자가는 분명히 실패자가 달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르셨음을 익히 주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실존하셨던 인간이셨지만 흠결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외치는 자들의 모든 죄가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신 십자가는 예수님의 인내하심, 즉 죽도록 순종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해탈자이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외치는 까닭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같은 뜻 다른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부인], [자기 비움]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부인]을 어떤 모습으로 보여주셨습니까.
I N C A R N A T I O N이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 성육신이라는 단어를 너무 부담 없이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의미에 대한 숙고함 없이 함부로 소리내어서는 안된다는 마음, 즉 송구한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처럼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신도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말이 어려워 이해되지 않음이 아니라, 그어진 한계 즉 범주를 벗어나는 현실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육신은 우리의 처지에서는 신비이고 이적입니다만 그런데 더 큰 이적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죽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누가 그 일을 돕기 때문입니까.
성령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완성될 수 있겠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일체 이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음입니다.
왜 이겠습니까.
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가장 큰 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제2위가 없는 공동 1위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