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칼럼] 여순 반란사건 74주년의 역사적 의미
10월 19일은 여순 반란사건(麗順 反亂事件)이 발생한 날이다. 여순 반란사건은 1948년의 10월 19일에 일어났으니 2022년의 10월 19일이 꼭 74주년 되는 날이다. 이 반란사건은 같은 해의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겠다.
여순 반란사건과 제주도의 4.3사건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제주도 4.3사건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남조선에서 8월 15일에 수립하는 건국을 방해하는 동시, 제주도를 자기들의 대남공작(對南 工作) 기지로 삼고자 인민군 공작원을 은밀히 잠입시켜 현지 빨갱이들과 공모해 터트린 사건이다. 이 사건을 주동한 공작원들은 현지 주민들을 선동해 그들을 앞장 세웠기 때문에 애꿎은 양민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국방경비대에 의해 바로 평정되었으나 사건 주동세력은 한라산에 일제가 태평양전쟁 때에 파놓은 동굴에서 저항했다. 동굴 속에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이들 반란군을 소탕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여수의 14연대가 출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여순 반란사건인 것이다.
당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는 출동명령을 받고 10월 19일에 부두에 집결했던 것이다. 이때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세포조직의 일원인 연대 인사게 <지창수> 상사가 뛰쳐나와 "우리는 동족상잔의 싸움터인 제주도에 가서는 안 되며, 북조선 인민군이 곧 남조선을 해방시켜줄 것이다" 라고 외쳤다. 이렇게 외치자 대열의 곳곳에 미리 잠복해 있던 좌익군인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켜 이에 항거하는 장병들을 사살하고 여수 시내에 진출했다.
여수를 장악한 반란군을 경찰관이나 우익진영의 인사들과 그 가족을 학살하면서 세력을 확산시켰다. 이들은 다음날(10월 20일)에 순천을 점령하고, 연이어 보성, 고흥, 광양, 구례, 곡성까지 장악했으나 국군의 반격으로 1주일 만에 진압되었다. 이때 토벌군에 쫓긴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피해 공비가 되었다. 지리산에는 6.25전쟁에서 패주한 인민군 패잔병도 떼지어 도피해 공비가 우글거렸다.
여순 반란사건은 이렇게 불행한 사건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제까지 군대 내부에 잠복해 있던 좌익 군인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이 기회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대적 숙군(肅軍) 조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이 숙군조치에서 당시 박정희 소령도 연루되었으나 조사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것이 판명되기도 했다.
만일 여순 반란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좌익 군인들이 6.25전쟁에서 군사반란을 일으켜 인민군에 합세했을 것을 생각하면 진실로 기적 같은 일이다.
나는 지난날 육군 장교로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고, 여순 반란사건을 일으킨 14연대가 주둔해 있던 병영에서도 복무했으니 그 현장이 지금에 와서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서 군에 입대해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전라남도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105사단 15연대(연대장 車甲俊중령)에 배치되었는데 뜻밖에 작전 주임장교로 보직 받았다. 연대 작전 주임장교는 직위(T/O)가 소령 자리인데 소위가 소령 자리를 차지한 것은 6.25전쟁 초기에 장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내기 육군 장교인 내가 공비 토벌 명령을 받고 엉성하게 무장한 사병들을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갔는데 공비와 조우하지 않았다. 이때 바라본 지리산의 연하봉, 벽소령, 뱀사골은 조용했으나 그 속에는 공비들이 준동한다고 여겨져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후에 나는 여순 반란사건을 일으킨 14연대가 주둔했던 여수의 신월리에 위치한 육군 제2 보충연대에 전보되어 여기서도 작전 주임장교 보직을 받았다. 이때 연대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金載圭) 중령이었다. 당시 김재규 연대장은 매우 과묵했고, 참모회의에서도 잔소리를 별로 하지 않고 각 참모들의 담당직무를 존중해주는 온유한 지휘관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군 경력을 뒤늦은 2017년에 인정받아 나는 6.25참전 국가 유공자로서의 대우까지 받고 있으니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오늘 맞이하는 여순 반란사건 70주년 기념일이 내게는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