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가을과 독서
바쁜 생활 속에서라도 잠시 눈을 들어 산천을 보면 가을이 온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을은 우리를 조금은 센티멘탈하게 만들고 문득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바람에 뒹구는 낙엽을 밟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연륜을 느끼게 되고, 어느새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느냐고 자문도 해보지만 엄연한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가을을 ‘회한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생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고, 거둔 것이나 별로 보람스러운 업적도 없이 지나온 세월에 대한 허무감과 무상함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과거를 다시 돌이키거나 되찾을 수는 없다. 후회보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하고 지금부터라도 후회 없는 삶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을에는 많은 책을 읽도록 권하고 싶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풍부한 사고력이 있고, 어떤 사건의 판단도 비교적 잘할 수 있다. 어느 대학 총장이 졸업식장에서 “법을 다루는 판검사 또는 변호사가 되려면 법학이나 행정학도 중요하지만 법조인이 되기 전에 세계문학전집이나 성경 같은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고 되도록 많은 독서를 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반드시 이런 거창한 직업인이 아니라도 우리는 적어도 가정을 다스리는 입장에 있고, 우리가 처해 있는 지역사회나 직장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지식과 교양이 필요하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식보다 당장 기술이 필요하고 전문분야의 학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 대학에서는 인문 계통 학과는 지망자가 적어서 폐쇄 직전에 있고, 반대로 기술분야인 엔지니어링 계통은 날로 지망자가 몰려들고 있다. 얼마 전 레이건 대통령도 시카고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컴퓨터의 중 요성을 말하면서 기술습득만이 이 나라를 잘살 수 있게 하는 첩경이라고 했다.
물론 과학의 첨단을 걷고 있는 현시대에 기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인간의 정서나 교양이 없는 기술인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 그 위대한 기계기술 속에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인 것이다. 이런 엔지니어일수록 책을 많이 읽고 음악도 들어야 한다. 또한 병을 고치는 의사도 풍부한 인생철학이 필요하고 문학적인 소양을 검해야 좋다. 환자와 상담한 때는 통중이나 수술의 고통을 잊게 하는 훈훈한 대화가 필요하다.
환자와 의사가 서로 환담하며 정답게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차가운 얼굴로 환자에게 일방적인 지시와 처방만을 내리는 의사는 병을 고치기 어럽다. 환자를 정신적으로 안정시키려면 풍부한 인정과 감화력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이런 것은 독서를 통해 없어진다.
목회를 하는 목사 또한 마찬가지다. 종교철학이나 신학, 목회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목사는 많은 독서를 하여 인간의 근본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인간이 종교를 찾는지 알아야 한다. 고작 성경강해 정도로 설교를 하는 목사로부터 우리는 신의 거룩함과 무한한 능력을 터득하기 어렵다.
많은 철학서적이나 문학작품 속에서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얻을 수 있고, 종교의 깊은 뜻과 진리를 터득할 수 있다. 카츄샤를 육적인 욕망으로 범한 네프류도프 백작의 양심 속에서 우리는 톨스토이의 양심과 종교적인 감회를 읽을 수 있다. 빵 하나를 홈치다 들킨 장발장의 긴 감옥생활을 읽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같은 도덕과 계율을 잡을 수 있다. 이런 명작을 읽으면서 우리들은 자라왔다. 때로는 작품 속의 주인공이 되어 같이 울고 웃으며 꿈 많은 청춘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요즘의 젊은이들에게서는 이런 낭만을 찾아볼 수 없다. 공부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금속성의 현대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또는 TV를 통해 간신히 뉴스를 듣는 것이 고작이다. 신문조차 읽지 않아서 신문사가 문을 닫고 출판사들이 속속 파산 선고를 하는 판이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현대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 출신들이 제대로 편지도 못 쓰고 자기가 전공한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할 줄도 모르는 형편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자란 청소년들이 장차 이나라를 이끌어 나갈 중추적인 역할을 할 때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이상한 개체로 변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자녀들에게 책을 읽도록 하고 명작을 골라서 같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낀 바를 함께 토론하며 독후감을 써서 발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겠다. 이 가을에는 꼭 몇 권만이라도 책을 읽도록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