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믿음의 여인 사라를 통하여 배우는 인생 레슨 (1) 실수와 실패까지도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 그 믿음이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계승되는 것을 소망하는 것! 그래서 내 삶을 돌아보게 되고, 그 가운데 기쁨과 감사를 가족들과 나누며, 또한 고민과 아픔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기도하는 것! 다름아닌, 그것이 바로 참 복인 것을 이제서야 조금씩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그 이야기를 한결같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서로 돕는 배필로서 가정을 소개하고 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사는 4대에 걸쳐 무려 38장이나 되는 긴 스토리로 엮어져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삶, 우리 가정의 모습을 은혜 가운데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아무쪼록 2022년 후반기에도 여러분의 삶 가까이에 성경이 펼쳐져 있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그 말씀 안에서 믿음의 눈이 떠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앞으로 두 번에 걸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곁을 한결같이 지켜온 한 여인의 삶을 돌아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 여인은 사라입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녀의 이름 또한 하나님에 의하여 바뀌어진 것이지요.
(아브람: 첫 아버지에서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로, 사래: 여주인에서 사라: 열국의 어머니로) 구약시대에는 이름이 곧 그 사람의 인생을 밝혀주는 의미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사라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히 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열국의 아버지로 삼으시고,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결단코 사라의 역할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가정의 중심이 어떻게 아버지뿐이겠습니까!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 없이 어떻게 한 가정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그 부르심 속에는 사라를 향한 부르심도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부부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세워가는데 있어 한 몸인 것입니다. 사라의 이야기는 창세기에 처음 이렇게 소개됩니다. “창 11:29-30) …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성경은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아내요, 불임의 여인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열국의 어미가 될 것 이라는 축복은 그녀에게 산 소망이요, 인생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축복의 부르심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공 이야기가 그렇듯이 약속의 성취는 더디 찾아오는 법이지요! 우리는 창세기 말씀을 통하여 사라의 긴 기다림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 그의 나이 99세가 될 때까지 그들은 장장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긴 기다림은 사라로 하여금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만들지요. 꼭 내가 직접 낳아야만 되는 것은 아닐꺼야! 내 남편의 씨만 받으면 되겠지! 사라는 자신의 몸 종 하갈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길고 긴 침묵으로 반응하십니다.
창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3년의 긴 침묵의 시간 동안 하나님이 정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이 창세기 기사가 상당히 압축된 표현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들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여 여기까지 온 두 사람에게는 그 긴 침묵의 시간들이 결코 평안했던 시절이 아니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 이 장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이 말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너희들은)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들은 분명 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왜 어렸을 때 그런 경험들 있지 않습니까! 무엇인가를 크게 잘못해서 벌을 받아야 할 때, 아버지가 다른 볼 일 때문에 잠시 기다리라 말씀하시지요. 그 때 그 짧은 순간 얼마나 긴장하며 기다렸습니까! 내가 얼마나 혼날까! 도대체 어디를 때리실까!
두려움에 압도되어 있는 바로 그 때에 의외로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녀석,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고, 어서 와서 밥이나 먹어! 갑자기 온 몸에 긴장이 풀리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으시지요!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은 바로 그 때 바뀌어 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을 듣게 되지요.
나는 전능한 하나님 (엘 샤다이) 이라! 분명, 온전히 기다리지 못한 사라의 실수가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녀의 지나온 삶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의 삶을 평가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한 여인의 삶을 바라보는 히브리서 기자의 관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성경은 그녀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듯 합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아버지 같으셔! 청년의 때를 지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아버지가 되면서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펼쳐진 그리 길지 않은 내 인생 속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준 사람들이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실수와 실패가 없는 완전한 삶이 아니라, 그 실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사용되어짐을 천천히 배워가는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역시도 실패하고 넘어진 누군가 에게 용서의 하나님, 기다리시는 하나님, 다시 찾아와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을 드러내 주는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긴긴 고난의 삶을 지나온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혹시나 요즘 자녀들 때문에 속 썩이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런 생각 한번 해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나는 몇 점짜리 자녀일까? (긴 침묵) 대답이 쉽지 않지요! 이런 생각 하나 만으로도 자녀들을 대하는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 지고 넉넉해 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