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입니까.
요즈음 세대에 참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문제, 즉 오늘날의 난제입니다.
진리를 무엇이라고 정의하십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의 생애를 살펴보며 우리가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생애는 일면 갑갑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이복형제 이스마엘에게 희롱당했습니다.
청년기에는 양처럼 제물이 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40세에는 아버지기 정해준 아내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기근의 때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똑같이 아내를 누이라 말하는 파렴치한 적일 때도 있었습니다.
노년에는 야곱에게 속아 장자의 축복을 차남에게 주는 잘 속는 자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삭이 이토록 복된 이름을 갖게 됨은 왜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를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의 계보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하나도 발견할 수 없음입니다.
그러면 언약 백성과 공명정대는
비례합니까.
반비례합니까.
언약 백성의 소명은 이 어두운 세상에 공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는 것인데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얼마나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삭에게 돋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경건하나 소란스럽지 않은 순종함입니다.
그는 전쟁의 경험도 없는 족장입니다.
그는 그저 언약 백성의 계보만을 잘 이어가는 무관의 장수 같음이 보입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특별히 험악한 세상을 치열하게 산 것 같지도 않음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에게 놀라운 치열함이 발견됩니다.
그에게서 일부일처제의 가정이 보입니다.
어찌 보면 가장 조용히 살았지만 가장 진화된 가정을 꾸렸던 것 같습니다.
그 시대에 그러한 삶을 살려면 얼마나 치열한 자기 절제, 내적 갈등이 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그 집안의 혈통은 그 아버지부터 아들 야곱에 이르기까지 여인을 멀리하는 집안 내력도 아니고 축첩이 그 당시에는 크게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여겨지지도 않던 때였음에도 뷸구하고입니다.
사람이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산다는 것은 큰 어려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참으로 큰 복을 갖고 태어난 자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리브가로부터 소생이 없을 때 그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은 자였습니다.
결혼 후 거의 20년 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서 임마누엘, 즉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창세기 25장 21절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함에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나니
하나님께서 왜 이삭의 이 어처구니없는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여기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축복 가운데 있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같이 간구할 수 있는 자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간구하는 자의 뼛속, 그 골수까지도 아시고 머리카락까지도 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 주셨음입니다.
그가 블로셋의 아비멜렉과의 우물사건,
그 브엘세바에서도 화친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을 통하여서도
그는 7배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손해 보는 것 같고
먼저 양보하는 것 같고
조급은 비겁한 것도 같고
그러함에도 그는 7배나 결실 있는
브엘세바의 삶을 사는 모습을 성경이 보여줍니다.
이삭에게 없는 것은 세속적 욕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누구나 가지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그의 생애에는 특별히 드러나지 않음이 특징이라 주장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
이삭의 삶
야곱의 삶 중에
누구의 삶을 스스로 택하고 싶습니까.
누구의 삶이 늘 공명정대한 삶, 즉 요즈음 세대에 추구해야 할 삶이라 여겨지십니까.
자기주장이 적은 삶
아니
자기주장이 없는 삶
즉,
아버지 하나님 뜻대로 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