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운드교회] 엄두가 나지 않습니까?

전문가 칼럼

[리사운드교회] 엄두가 나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무엇입니까.

귀찮다, 어렵다, 하기 싫다, 그걸 어떻게 해, 옛날에 다 해봤어 등등 참으로 남이 들으면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말을 우리는 일상으로 내뱉으며 살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귀찮게 합니까.

무엇이 우리를 어렵게 합니까.

무엇이 우리를 게으르게 합니까.

우리의 핑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 연약함이 어디로 부터입니까.


나이 들수록 우리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뱉어지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토록 비활동적이게, 비협조적이게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전에는 모든 난관이 오히려 동기부여의 기회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복지부동의 근거 됨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체험입니까. 우리가 이미 지혜로워졌음입니까.

왕년에 가졌던 그 혈기충만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이제는 새로움이 도전이 되지 않고 귀찮음이 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의욕적이라는 말이 생각은 납니까.

이제는 모을 때가 아니라 버릴 때라고 말은 하면서 또다시 모으는 세대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전에는 무엇이 이율배반적인 것인지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게 느껴졌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음을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격세지감이란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세월이 갈수록 무언가 더 뚜렷해져야 하는데 지금은 살수록 더 암울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됨은 나의 무엇에서 비롯된 겁니까. 비현실적 사고 때문입니까.


현실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내가 잘되는 것입니까.

이웃이 번창하는 것입니까.


옛적에는 홍익인간이란 말이 절대 진리였다고 기억되는데 혹시 나의 착각이었습니까.

인간이 타인을 스스로 이롭게 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어쩌면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위안을 위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슬픔, 억울함, 애통함, 저절함을 느낄 수 있음이 살아 있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특별히 억울할 것도, 애틋할 것도, 기뻐할 것도 가질 수 없는 상태를 우울함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욕 상실입니다.


살아보니 그간에 가셨던 그 모든 의욕적인 것들이 부질없이만 느껴짐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인도에 가면 비굴하게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고 합니다.

자신들을 돕는 것이 상대의 의무이고, 결국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여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로 너줌으로를 너를 복 받게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그들을 떳떳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푸는 이의 자세로서는 일부 맞는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받는 사람의 받은 태도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도 그런 생각이 있다고 여겨짐은 왜 이겠습니까.

타인의 것을 부당하게 가져오면서도, 그 일이 나의 일이 되면 언제인지 모르게 타당하게 되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요즘 초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한 가지 이슈가 되는 것 가운데 암 치료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암 치료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가운데에 50- 60세에 암 발병을 알게 되면 치료 여부를 생각하기를 고려해야 하고, 60세 이상은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결론 비슷한 것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90세에 암 치료를 받고 오년을 더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물론 동의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결론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엄두 나지 않는 일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면은 우리는 이미 예전에 엄두도 못 냈던 일을 다 이룬 세대인 것 같지 않습니까.

구석기시대나 신석기 시대에 2023년을 비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처음으로 진공관을 이용한 컴퓨터 세대와 지금 2023년을 비교하는 것을 타당하지않다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50년에 그 진공관의 증폭작용에 감탄하던 세대가 어떻게 2023년에 우리가 누리는 것을 엄두나 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후 세대들은 지금 우리가 뜬 구름 같이 여기 것을 누리며 살 것에 대한 의심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50년 후의 시대를 그린다고 해서 그대로 될리는 만무하지만 꿈을 꾸는 것은 역시 노년의 특권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송장도 걸으면 반은 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송장에게 걸을 엄두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성은 무엇이 좋은지를 알기만 하지 행동할 의지가 박약함을 드러냄이 일상인 것 같지 않습니까. 끔찍하지 않습니까.

엄두가 나지 않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선한 능력으로” 라는 귀한 말씀을 남긴 본  목사님이 떠오릅니다.


예전에 독일이 패망했을 때 그들에게 아직 소망 있음을 느끼게 했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열차를 기다리던 군중이 불렀던 찬양 때문입니다.

그 폐전이라는 슬픈 상황 속에서도 찬양함을 누가 허락하셨겠습니까.


저 바벨론 강가에서 포르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래할 엄두를 누가 허락하셨겠습니까.

사라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누가 엄두 낼 수 있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엄두 낼 수 없다고 그것이 실상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다스리는 큰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세상에 산 사람 중에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한 사람이 누구 이겠습니까.

여러 이름을 떠올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욥을 그 중에 한 명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요욥은 가장 까닭 없이 고통당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나서는 하나님을 찬양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게 하셨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로 육신의 한계를 넘어세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는 자의 날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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