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 회계칼럼] 673. 과잉생산과 사치 3 - 시애틀한인 회계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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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목 회계칼럼] 673. 과잉생산과 사치 3 - 시애틀한인 회계사 칼럼

<지난 호에 이어>

처음에는 사치품이었다가 나중에는 일용품이 된 품목으로, 지난 주 칼럼(672호)에는 칼러 텔레비, 개인용 컴퓨터, HDTV, 스마트폰 등 네 가지를 언급했다. 이런 종류의 물품은 한없이 많고, 지금은 전기자동차가 그러한 품목으로 될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문명의 새로운 열매가 나타났을 때는 수량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에 생산비와 소비자가격이 높아서 아무나 살 수 없다. 일부 저축이 충분한 사람들이 그것을 사면, 그것의 시장이 커진다. 시장 규모의 성장은 생산자끼리의 혁신 경쟁과 규모 경쟁을 한꺼번에 가져온다. 그 경젱을 통하여 가격이 하락하여, 나중에는 아무나 누리는 일용품으로 변한다. 앞 문단의 모든 물품과 수많은 다른 물품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왔다. 예를 들어 칼러 텔레비의 가격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지난 30년동안 50분의 1로 떨어졌다. 수년 이내에 전기자동차 가격도 기름 자동차 가격 수준으로 내려갈 전망이 밝다.  

혁신 경쟁과 규모 경쟁을 통한 가격 하락을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힘은, 앞 문단에 줄친 “일부 저축이 충분한 사람들”에게서 온다. 그들이 없으면, 기존 제품보다 상당히 수준 높은 새로운 제품이 나왔을 때 그 새로운 제품의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다. 만일 새로운 제품의 수준이 기존 제품보다 아주 약간만 높다면, 우선은 그러한 신제품을 사줄 사람이 많을 것이나 곧 이어 좀더 수준 높은 신제품이 나와서 처음 신제품의 수명은 짧게 끝난다. 예를 들면 노키아 이동 전화기는 어디까지나 전화기였고, 따라서 노키아와 그 경쟁자들의 시대는 짧게 지나갔다. 반면, 아이폰은 전화기인 동시에 컴퓨터이며, 따라서 애플과 그 경쟁자들의 제품군은 길게길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위에서 밑줄친 저축이 충분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불평등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활수준에 살고 있다면, 수준 높아진 제품을 통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사회에 극빈자가 많은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상당한 정도의 불평등이 있는 불행한 일이 아니다. 극빈과 불평등은 서로 다른 것이다. 소위 ‘양극화’라는 표현은 때때로 불평등과 극빈을 혼동시킨다.  

극빈자 아닌 사람들에게눈 극빈자를 먹여 살릴 의무가 있고, 그것은 각국의 헌법 차원에서는 생존권이라는 용어로 설명되고 유엔 차원에서는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제도적 원칙 아래서 극빈층이 없어지지 않으면, 예외를 만들어서 극빈자를 막여 살려야 한다. 

극빈자를 먹여살리는 일은 재원이 없으면 불가능하며, 재원을 키우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개인용 컴퓨터의 발명과 같은 가치의 폭발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일이다. 위애서 본 바, 불평등이 없으면 가치 폭발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극빈자를 먹여살리는 일을 가장 심하게 방해하는 사고방식은 불평등에의 증오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계산의 문제다. 도덕 정신의 부실 때문이 아니라 계산의 착오 때문에, 우리는 도덕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던 국가들에서 오히려 더 많은 극빈을 목격해 왔다. 

지난 주 칼럼(672호)에서 본 바, 마르크스가 사치에 대한 증오심을 수정할 기회는 1867년 자본론 재1권 속에서 이미 발견되었다. 사치품 소비의 증가는 도덕적으로 나쁘고 사치품 소비의 감소는 고용이 줄어들어서 나쁘다는 자신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만한 충분한 지성이 마르크스 속에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치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은 1894년에 출간된 자본론 제3권에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면 자본론 제3권 제26장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Wealth is the cause of luxury and luxury has a destructive effect on wealth. 부는 사치의 원인이며, 사치는 부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도덕 교육을 위해서는 유용한 말일 수도 있으나, 계산에 근거한 말은 아니다. 부를 파괴하는 것은 사치 자체가 아니라 분수에 넘는 사치다. 여유 있는 자의 분수에 맞는 사치는, 고용을 창출하여 부의 재분배를 돕는다. 또, 그것은 과잉생산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더구나, 처음에는 사치였던 것이 나중에 일용품이 되면, 사회 전체의 문명 수준이 그만큼 상승한다. 

마르크스는 사치에 대한 지나친 증오심으로 인하여 사치의 긍정적인 면을 계산해볼 의욕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만일 마르크스에게 사치를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볼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엥겔스가 붙여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칭호와 제법 잘 어울릴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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