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사모, 아름다운 그 이름 " - 시애틀한인종교칼럼
2004년에 월간사모의 주제로 월간사모에 실렸던 글로 간증이기도 하다.
사모로 32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한국에서 10년, 미국의 북서부 타코마에서 22년을 살고 있다.
한번도 사모가 되려고 생각지 않았는데 신학대학생과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개척교회를 세우시고 전도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산으로 들로 바다로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던 내가 사모가 되었다는 것은 기적의 시작이었다.
주일도 범하면서 놀러 다녔지만, 집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곳에서 놀라운 기적도 일어나고 젊은 전도사님이 밤을 새우며 청아한 음성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말로 찬양과 기도를 올릴 때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면 나는 지옥에 가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생겼고 젊은 전도사님의 칼 같은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으며 주님과 어머니의 은혜로 그 전도사님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71년 12월 25일. 약혼식을 하고 마침 첫눈이 내리는 성탄 밤길을 한없이 추운 줄도 모르고 걸어 다니다가 밤늦게 같이 집으로 들어와 각기 자기 방으로 갔다.
그때 그는 집사님 부부와 초라하게 우리 집에서, 아니 교회에서 살고 있었다.
굉장히 사치하고 세상적 욕망이 가득한 내가 집의 사업이 망해서 장학금으로 신학교에 다니는 가난하고 초라한 그를 사랑하게 되다니 …. 그날 신문에 대연각호텔 화제로 온통 세상이 떠들썩했었다.
높은 창에서 벌거벗고 뛰어내리는 여인의 사진과 아름답지 못한 사연들과 죽음들이 우리의 약혼식 날을 더 기억나게 하고 있다.
그다음 해 2월 5일 신학대학 방학 동안에 결혼식 날짜를 잡았는데 9살 위인 노총각 오빠가 그 날짜가 좋다고 그 날에 결혼을 하시겠다고 해서 우리는 양보하고 다른 날을 잡았다.
그는 방 한 칸도 마련할 수가 없었는데도 오직 믿음으로 결혼을 하겠다고 했고 나는 걱정하면서도 그를 따랐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오빠가 방을 얻어 놓았고 신혼여행 갈 가방까지 준비했는데 그 결혼이 참으로 묘하게 깨졌다. 옛날 애인이 나타나서 깨트렸고 나중에는 그 여인도 가버리고 한참 후에 신학대학에 편입하여 다닐 때 지금의 좋은 올케를 얻게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2월 5일에 결혼을 했고 오빠가 얻어 놓은 방에 살게 되었고, 오빠가 사놓은 가방을 가지고 신혼여행을 가게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그는 특별 금식기도를 했지만 나는 기도할 줄도 몰랐고 믿음이 너무나 없었고 산기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여자가 하루아침에 개척교회 사모가 되었다.
초라한 우리 개척교회의 표어는 청년들이 산 기도에 가서 받은 "온 세계에 나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였고 나의 남편은 그 사명을 이룰 주의 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나는 그때부터 한없이 절망하며 괴로워하면서 외로움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다.
가난한 달동네 어른은 별로 없고 청년들과 학생들, 어린이들이 들끓는 교회는 너무나 초라하고 소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모스크바, 모즈독, 중국, 멕시코, 파라과이, 남아공, 케냐, 몽골의 신학교를 다니며 강의를 하는 남편을 보면서 "이제야 그 예언들이 이루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 청년들 속에서 많은 선교사님들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믿음이 없어서 많이 괴로워했지만 그러나 사모로 내가 자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강권적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앞으로 날마다 더 놀라운 기적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가슴이 설렌다. 주님이 주신, 사모 아름다운 그 이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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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 타코마연합장로교회에서 27년 목회하다가 69세에 은퇴하고 한국에 가서 큰터교회에서 협동목사로, 또 에스더 기도운동센터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꼭 3년을 살고 딸이 개척교회를 시작한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다시 미국으로 들어와서 4년을 딸의 목회를 돕다가 딸이 좋은 교회를 샀고 안정이 되어 지금은 제자가 목회하는 교회를 돕고 있다.
그는 미국 시민권자로 한국 지방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성전 수리를 하던 중에 천장에서 무거운 것이 떨어져 목뼈를 다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어 미국으로 들어와 18년이 되었다.
긴 세월 살아계신 순교자로 주님만 바라보고 단아한 모습으로 살고 계시는데 그런 모습은 온전히 사모님의 희생하심으로 유지되고 사모님이 너무 귀하신 분이다.
그 사모님은 처녀 시절에 내 청년부 제자였고 나와 같은 사모가 되고 싶다고 하고 신학생과 결혼해서 나하고 똑같이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낳았는데 큰딸은 결혼했고 둘째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들이 모두 부모에게 효도하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교회를 받들던 집사님 부부가 멀리 타주로 이사를 갔고 세 아이들도 멀리 살고 펜데믹으로 교회가 힘들고 어려웠는데 우리가 가니 너무 좋아하고 자기들을 위해서 목사님이 한국에서 오셨다고 한다.
요리 솜씨가 좋은 사모님이 점심도 정성껏 준비해서 대접을 잘 해서 주일날은 영과 육이 즐거운 날이다.
주일날은 두 목사님이 서로 번갈아 설교하고 수요 성경공부는 남편이 인도하고 있는데 너무 좋다. 사모님이 “칼로스월드선교”도 정부에 등록해 주고 교회 헌금은 모두 선교에 쓰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러시아 선교사님이 코로나에 걸려서 고생하셔서 선교헌금을 2000불 보냈는데 올 1월에는 짐바브웨 선교사님이 코로나에 걸려서 고생하시는 유튜브 모습에 선교 임원들이 즉석에서 헌금하여 2000불을 보내기로 했다.
한 사람의 선교사님은 너무나 귀하고 하나님께서 그만큼 만들려고 고생하셨는데 속히 일어나시기를 기도드리고 양질의 치료를 빋으시라고 선교비를 보낸다.
그리고 새터민 신학생들 후원도 하는데 내 DAUM 카페에 있는 남편의 설교를 8편씩 읽고 독후감을 쓰는 문제가 과제인데 써내지 않는 사람은 탈락이다.
그들이 써낸 독후감은 내 “칼로스월드미션” DAUM카페에 다 올린다. 공부도 하고 후원금도 받는 것이 하늘에서 주는 상금이라고 설파하고 이곳에서 후원자들을 모집하여 맺어주고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누고 기도한다.
남편은 놀 줄 모르고 설교를 해야만 사는 사람이니 이렇게 쉬지 않고 설교를 해야 한다. 나도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기를 계속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