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문학칼럼] "고 조영철 문우(文友)의 서거를 슬퍼하며" - 시애틀한인문학칼럼
이성수(수필가)
1월 8일 아침 일찍이 서북미 문인협회 조영철 시인님이 향년 82세로 서거하였다는 카카오톡 문자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 전 신정(新正) 때 전화로 송구영신, 근하신년, 복(福) 많이 받고 건강하시라고 새해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동안 숙환으로 투병하느라 고생이 많은 것 같아 건강이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습니다.
전화기의 저편의 음성이 비교적 건강하게 들렸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코로나19 역병 때문에 만나지를 못하고 줌(Zoom) 미팅으로 모이는데도 뵙지를 못해 퍽 궁금했는데 건강이 회복되었다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2018년 9월 뿌리문학상 시상식을 마치며 조 시인님은 이사장 인사 순서에서 말기 폐암이 걸렸었는데 기적적으로 호전되고 있다며 그 이유가 시(詩)를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우리 회원 모두 처음 듣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알리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심려가 될 것 같아 그랬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2~3년간 많이 회복되어 모임에도 잘 참석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였는데 갑작스런 비보(悲報)는 우리 회원 모두에게 깊은 슬픔을 주었습니다.
사실은 조 시인님은 최근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서거한 것으로 전해져 안타깝습니다.
내가 조영철 시인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기독신문사 주최 ‘에덴 문학상’ 공모에 입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워싱턴문인협회에 가입할 때였습니다. 이듬해에 서북미 문인협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문인협회에 가입하여 매월 한 번씩 월례회를 가졌습니다. 첫 모임에서 내가 당선된 작품을 낭독했습니다. 그때 모인 회원 몇 명이 나의 작품을 평해 주었는데 다들 좋게 말하였으나 유독 조 시인님만 심하게 부정적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에서 각자 1달 동안 창작한 자작 글을 읽고 디스커션(discussion)하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대개 회원들은 남이 쓴 글을 비판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오타나 철자법 틀린 것을 지적하는 정도이고, 더러 이런 점은 이렇게 쓰면 좋겠다고 조심해서 지적을 해주었는데 조 시인님은 나의 수필 작품에 대하여 지나치게 잘못된 곳을 듣기 민망할 정도로 지적하였습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아 몇 번이고 모임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이는 장소가 내가 사는 아파트 회의실이라 참고 견뎠습니다. 만일 잘못 쓴 부분을 별로 지적하지 않고 그냥 듣기 좋게 잘 썼다는 평을 받으면 나의 글은 그 이상 발전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글을 쓰기 싫은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여 글을 썼습니다. 조 시인님은 여전히 심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문학’이란 문학잡지 한 권이 집에 배달되었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몰랐습니다. 2년의 구독이었습니다. 수필 글이 많이 실려 있었습니다.
나중에 조 시인님이 구독료를 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모임에서 조 시인님이 내 글을 지적하는 빈도가 줄어들었으며 잘 쓴 곳을 찾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러 문인들이 모인 공식석상에서 지적당하는 것이 창피하였고 몹시 서운했습니다. 하지만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는 조 시인님의 기분이 좋았을까요?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조 시인님은 나와 장르(Genre)가 다릅니다. 나는 수필, 그는 시(詩)입니다. 나와 같은 장르도 아닌데 심하게 간섭하고 비평하는 것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지만 단 한 번도 서운한 심정을 직접 표출하지는 않았습니다. 조 시인님도 미안했던지 문학잡지를 사 주어 좋은 글을 쓰도록 한 것 같습니다.
나는 그동안 노력하여 새천년 한국 문인 제17회 신인 문학상 ‘수필’에 당선돼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아직 아마추어지만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것도 다 조 시인님 덕택입니다.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좋은 글을 창작하도록 인도해 준 조 시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고 조영철 시인님과 서북미 문인협회원으로 동고동락한지도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그 긴 시간 조 시인님은 우리 협회의 대들보가 되어 이사장직을 7년도 넘게 맡아 헌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명예이사장이라고 호칭합니다.
응모한 뿌리문학상 작품을 같이 심사하던 일, 재미 한국학교 글짓기 경시대회에 초청되어 심사하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특히 2019년 뿌리문학 시상식이 끝나고 회원 작품 낭송 때 내가 쓴 ‘메기의 추억’을 아들(석주)이 낭송하고 내가 뒤에서 배경 음악을 피리로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의 추억‘을 은은하게 연주했을 때 잘했다고 좋아하던 조 시인님은 “작품이 애절한데 피리 연주 또한 슬퍼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라고 기뻐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망년회 때마다 널찍한 자택으로 우리 회원을 초청하여 직접 사육한 양계 달걀을 시식하게 했습니다. 한여름이면 무화과 열매를 따 주었으며 근교 공원으로 여름 야유회를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도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특히 오리건 문인협회의 초청으로 1박2일 방문을 하여 그곳 방송국에서 시. 수필을 낭송한 것도 잊지 못합니다.
문우(文友)가 남긴 시를 읽으니 내 옆에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납니다..
바람 불 때 풀잎은
조 영 철
바람이 부는 날 풀잎은 원초부터 제목소리를 하고파
하얀 하늘 끝자락을 이불삼아 풀잎이란 흔한 이름으로 비바람에 흘려
오랜 세월에 엎드렸다.
어둔 밤 세상이 잠들었을 때 풀 벌레소리서 어둠을 잊었고
죽은 듯한 적막에 뭇 새들 잠재우게 그저 낮게 부는 바람에도
몸을 흔들지 않았다.
때로는 눈보라 세차게 부는 날
높은 구름 탓하지 않고 해일 같은 울분을 되삼키며
뻔뻔스런 배짱을 구름에 날리고 스스로 데운 체온으로
물결 같은 춤을 추었다.
햇살을 당겨 한 아름 품어본 날 슬픔에 젖은 추억을 멀리 뿌리고
더워진 가슴에 나비들 하늘거리며 흐르는 대로 쓰러지자는 뜻을
새들과 벌레들은 시작부터 알고 있었다.
낙엽 지는 투명한 가을에 앙상한 잎새 살아온 흔적을 불태워도
외론 뿌리로 대지에 발 딛고 바람이 부는 날에
제 혼자 쓰러져 풀벌레 울음소리 먹고 사는 풀잎 일 뿐이다.
조영철 시인님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하게 영면하소서. 아울러 유족 여러분께도 심심한 위로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서북미 문인협회 회원 모두 열심히 좋을 글을 써서 문우(文友)의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