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 칼럼] 南北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38선이 우리 민족에게 온갖 비극을 초래했다. 그 비극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가슴을 도려내는 비극이 사랑하는 가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아 서로 만나기를 애타게 염원하는 아픔이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현장에는 언제나 피눈물을 흘리는 애절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현장을 여기에 묘사해 보고자 한다.
지난 2015년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 동안 강원도 금강산 자락에 마련된 면회소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도 슬픔의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눈물바다는 38선이 빚어낸 비극 중의 비극인 곳이다. 이 비극의 현장에서 일어난 애절한 사연을 극적으로 묘사해 보고자 한다.
이날 이 현장의 주인공은 6·25전쟁 당시의 신혼부부가 南과 北으로 헤어진 지 60년 만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만나는 애절한 자리였다. 이 두 주인공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게 의용군을 끌려갔던 신랑 할아버지와 그 신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수절한 신부 할머니인 것이다.
이날 신부 할머니는 안내원을 따라 상봉 장소의 지정된 테이블에 들어서니 그곳에는 꿈에 그리던 신랑은 없고 낯선 할아버지가 앉아있기에 잠시 두리번거렸다. 이때 안내원이 다가와 다시 알려준 자세한 소개로 옛 신랑임을 확인한 할머니 신부는 실신하듯이 잠시 휘청거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정말 <최 아무개> 맞는기오”라는 물음에 할아버지 신랑은 “그렇소, 내가 <최 아무개> 틀림없소”라고 대답했고, 할머니 신부는 그제서야 흐느끼며 몸을 가구지 못하다가 무의식 중에 할아버지 신랑 쪽으로 쓰러진다. 이에 할아버지 신랑은 반사적으로 할머니 신부를 일으켜 안아주며 함께 흐느낀다.
할아버지 신랑에게 안긴 할머니 신부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있다가 일어나 제자리에 도로 앉는다. 그리고 신혼 당시의 모습을 찾으려는 듯이 늙은 신랑의 주름진 얼굴을 자세히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용군으로 끌려가 얼마나 고생했소”라는 물음에 할아버지 신랑은 “전쟁 중에 모진 고생을 했지만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났소”라는 대답에 할머니 신부는 다시 흐느끼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그 동안 쌓인 이야기를 다정하기 주고 받는다.
이야기 중에 할아버지 신랑이 북조선에서 장가들어 3남매를 두었다는 말에 할머니 신부는 만감이 교차하는지 한동안 흐느끼다가 다시 입을 연다. “지금 살고있는 부인의 마음씨는 어때요”라는 물음에 할아버지 신랑은 “괜찮아”라고 응답한다. 이에 할머니 신부는 마음이 놓인 듯한 표정으로 “그럼 다행이오”라고 대답하면서도 착잡한 심정에서 더욱 심하게 흐느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제 와서 옛 남편이 6·25전쟁에서 고생했으면 어떻고, 북조선에서 재혼했다는 부인의 마음씨가 고운지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기다리던 남편이 다행히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새로 장가든 부인과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질투하기는커녕 오히려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할머니 신부의 할아버지 신랑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 지극한지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 신부는 여러 가지 상념에 젖었는지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다가 할아버지 신랑의 주름진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여보, 이제 헤어지지 말고 이대로 함께 삽시다”라며 밝은 표정으로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부부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너무도 아까워 밤잠을 설치면서 다정하게 속삭인다.
이렇게 꿈 같은 상봉 기간이 어느덧 끝나고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때 할머니 신부는 떠나가는 할아버지 신랑의 팔을 붙잡고 “가지마, 당신이 가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라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이 애절한 이산가족의 상봉 현장은 38선의 비극을 한데 압축한 <현대판 순애보(殉愛譜)>라는 한 편의 영화인 것이다. 이 영화에는 감독이나 연출이나 배우는 없고, 오직 그리움과 한(恨)이 맺힌 이산의 부부가 만든 명화(名畵) 중의 명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