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안상목 회계사] 680. 과잉생산과 사치 10 - 시애틀한인 회계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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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안상목 회계사] 680. 과잉생산과 사치 10 - 시애틀한인 회계사칼럼

<지난 호에 이어>

자유에 관한 마르크스이 생각은 흔히 “자유는 필수사항을 의식하는 것이다 (Freedom is the consciousness of necessity)” 하는 말을 통하여 알려져 왔다. 


이 짧고 난해한 문장은 한때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다” 따위로 오역되어 널리 퍼졌다. 원래 헤겔의 말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헤겔의 말을 (마르크스가 아닌) 엥겔스가 부활시켰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마르크스가 이 말을 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나, 마르크스의 어느 저서에 그 말이 나오는지를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지난 주 칼럼(679호)에서 인용된, 자본론 제3권 48장의 자유론은 앞 문단의 난해한 명제가 만들어진 근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난 주 칼럼에서 본 바, 마르크스에게 자유란 결국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였다. 필요한 것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노동한 다음, 필요하지 않은 생산을 하지 않고 여유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 시간을 어디에 쓰는지는, 그 인용문 말미에 나오는 다음 부분에서 나타난다. 


“Beyond it begins that development of human energy which is an end in itself, the true realm of freedom, which, however, can blossom forth only with this realm of necessity as its basis. The shortening of the working-day is its basic prerequisite. 


그것(주: 생산과 노동이 있는, 필요의 영역)을 지나야만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 에너지의 개발이 시작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영역이며, 그 영역은 이 필요의 영역을 기초로 하여서만 피어날 수 있다. 노동시간의 축소는 기초적인 전제조건이다.”


마르크스는 여유시간을 써서 인간이 할 일을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 에너지의 개발”이라 하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처럼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분명히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도 거기에 해당될까? 낚시는? 바둑은? 전자게임은? 만일 누군가가 마르크스를 잡아놓고 낚시나 바둑 같은 특정활동이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 에너지 개발” 해당되는지 따져 묻는다면, 마르크스는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르게 답할 것 같다. 


특정 활동이 사치로 보인다 하더라도, 과잉생산에 관련하여 마르크스가 배격한 사치는 “생산”이었다. 여가의 선용이 사치스럽게 보였을 때 마르크스가 무슨 말을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개인적 사치성 활동을 인간 에너지 개발에 포함시키지 않을 경우와 포함시킬 경우를 따로따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 에너지 개발에 사치성 활동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가 꿈꾸는 자유는 사치가 아닌 영역에 제한된다. 주어진 시간동안 하지 않아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속의 시간이지 자유의 시간이 아니다. 


해도 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마르크스의 생각에 맞추어야 한다면, 마르크스의 자유는 마르크스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는 구속이다. 이처럼, 인간 에너지 개발에 사치를 제외한다면, “자유는 곧 구속이다”하는 비논리에 빠진다.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 에너지 개발에 사치성 활동도 포함된다는 말을 마르크스의 사치품 배척 정신과 연결하면, “상업적으로 생산되는 사치품은 안되고 여가 선용을 통한 개인적인 사치 활동은 된다”는 뜻이다. 


상업적으로 생산되는 사치품은 개인적 여가 활용으로 생산되는 사치품보다 값이 싸고 품질이 좋다. 시장 생산의 이러한 기능을 마르크스는 “사회적분업”이라 했다. 


마르크스는 공장 내의 분업에는 반기를 들었지만, 이러한 사회적분업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자본론 제1권에서 “social division of labour”로 검색하면 사회적분업에 관한 마르크스의 생각을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다. 


앞 문단에는 마르크스의 세 가지 생각이 담겨 있다. 첫째, 상업적인 사치품 생산은 안된다. 둘째, 사회적 분업은 좋은 것이다. 세째, 개인적인 여가선용으로서의 사치 활동은 된다. 


그런데, 사회적 분업이 좋은 것이라면 오히려 상업적 가치품 생산이 개인적 사치활동보다 좋은 것이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생각을 모두 살릴 방법이 없다. 이 부분에서, 여가 선용을 통하여 만들어진 사치품 그 자체보다는 사치품을 만들려 하는 활동에 가치가 있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목적이 바람직하지 않은 일에 인간 에너지의 개발이 가능한지는 철학의 분야이므로 더이상 논의를 생략한다.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참고.) 


요약하면, 인용문의 줄친 부분에 사치품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자유가 곧 구속이라는 말이 되고, 사치품을 포함한다면 (1) 마르크스의 사치품 배격 노선과 (2) 마르크스의 사회적분업 지지 노선 등 두 가지를 모두 성립시키지 못한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자유론은 설 자리를 잃고, 이 글 초두의 짧고 난해한 명제는 공허한 말이 된다. 


마르크스가 저러한 비논리에 빠진 것은, 그의 사고 체계에는 중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노동을 적게 하고 싶지만 너무 적게 하고 싶지는 않다. 마르크스 이후 자유세계에서 추구된 것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과로로부터의 자유였다. 미국에서 주 40시간의 법(Fair Labor Standards Act)이 시행된 것은 1940년이었다. 


그 40시간 규정은 80년이 지난 아직도 그대로다. 자발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는 업체도 있지만, 법은 아직 주 40 시간보다 적은 노동시간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은 40시간도 너무 많다 하는 의견이 아직은 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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