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알 밤- 시애틀한인로컬칼럼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알 밤- 시애틀한인로컬칼럼

이성수(수필가)


고향집에 오니 감나무와 밤나무가 나를 반겼다. 밤은 이민 가기 전에 심은 것으로 지금은 성목(成木)이 되었다. 고욤나무에 수시(水柿)품종을 접목한 감나무에는 감이 빨갛게 열리고 옆에 있는 두 그루의 밤나무는 아람 들어서 밤이 떨어지고 있었다. 

올해는 감은 흉년이 들고, 밤은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성목이 된 큰 밤나무나 감나무들은 비료를 주지 않기 때문에 해거리를 한다. 그래서 한 해는 많이 열리고 한 해는 적게 열린다. 물론 기후의 영향도 있다. 개화기에 비가 많이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수정(受精)이 안 되어 흉년이 들기도 한다.

밤나무를 바라보니 가시 돋친 밤송이가 나를 보고 활짝 웃고 있다. 찔리면 금방 피가 철철 날 것만 같은 날카로운 밤 가시는 살벌한 공격용 무기라 공포감마저 든다. 누구도 그 무서운 가시에 접근하길 꺼린다. 가시 속에 맛있는 밤이 들어 있다 해도 말이다. 

밤송이의 웃음은 무서운 가시와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누구도 접근을 못하게 가시로 철저하게 무장한 밤송이는 안에서 밤이 영글어 가면서 푸른색 옷을 붉은 갈색 옷으로 가라 입고 드디어 입을 벌려 웃는다. 

여러 개의 밤송이는 약속이나 한 듯이 땅을 향하여 웃기 시작한다.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던 밤송이는 평화스러운 미소와 함께 벌겋게 익어가는 밤알을 선보인다. 가시 속에 품고 있는 밤알은 적게는 한 톨이고 많게는 세 톨이다. 외톨밤이 굵고 세톨 밤이 작다.

밤송이 속에 있는 밤은 영락없이 둥지 속에 들어 있는 새 새끼 같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다를 뿐이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면 작은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를 것만 같다.   

지구상에 수많은 과일나무가 존재하지만 밤나무처럼 밤이 열릴 때부터 가시로 둘려 쌓여 밤이 영글 때 까지 보호해 주는 과일은 없을 것이다. 

밤은 은행이나 호두처럼 속에 씨가 들어있지 않고 밤 전체가 하나의 큰 씨이다. 사과, 감. 배는 속에 여러 개의 작은 씨가 들어 있다. 사람이나 짐승이 먹더라도 씨는 버림으로 땅에 묻혀 종족을 번식하지만 사람이나 짐승이 밤을 먹으면 종족을 번식하지 못한다. 다 먹었으니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을 따 먹지 못하게 가시로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밤송이가 웃으면 알밤이 저절로 땅에 떨어진다. 그 알밤은 아주 단단한 껍질로 쌓여 먹지 못하게 밤 씨를 보호한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칼로 벗겨야 속의 밤을 먹을 수 있다. 겉껍질을 벗긴다고 해서 밤을 먹을 수 없다. 겉껍질 속에 있는 속껍질은 아주 떫어 먹을 수 없는 타닌이란 화학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밤이 영글 때 까지는 날카로운 가시로 보호해 주고 영근 후면 단단한 껍질로 싸서 보호해 줄 뿐 아니라 화학성분(타닌)까지 함유하는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밤을 주어 과도(果刀))로 단단한 겉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제거하여 하얀 속살을 먹는다. 다람쥐는 날카로운 이빨로 겉껍질을 까고 속껍질을 벗겨 먹는다. 하지만 개에게 알밤을 주면 어금니로 깨쳐 먹으려하지만 떫은 타닌 때문에 토해낸다, 밤을 굽거나 찌면 타닌의 떫은맛이 없어진다.

활짝 웃는 밤송이는 땅을 향해 그 각도를 조종한다. 만일 하늘을 향했다면 알밤이 밤송이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     

알밤이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둥지를 떠나 땅으로 추락한다. 단단한 알밤이 땅위에 딱!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둥근다. 다람쥐 한 마리가 어디 숨어 있다가 떨어지는 알밤을 쪼르르 따라가서 입에 문다. 보기에 예쁜 한국다람쥐이다. 미국에 사는 다람쥐는 한국다람쥐처럼 예쁘지 않다. 크기도 크고 색깔도 충충하고 얼굴도 못생겼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미국 다람쥐는 사람을 따르는데 한국다람쥐는 사람을 보면 도망친다. 

1980년 전까지 수백만 마리의 한국 다람쥐가 해외로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드렸다. 예쁜 한국다람쥐를 애완용으로 기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한국산 다람쥐가 진드기에 의해 발생하는 라임병이란 병의 숙주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이제는 애완다람쥐가 아니고 내다 버리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시집간 한국다람쥐가 예쁘다고 사랑을 받았는데 타국에서 버림을 받았다니 속이 상한다. 

다람쥐는 밤을 물고서 땅속에 갈무리한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땅에다 묻은 곳이 어디인지 기억을 못해 땅속에 묻힌 채로 겨울을 내고 봄에 싹이 난다.   . 

하나님은 오묘한 장조 솜씨를 갖고 계시다. 다람쥐가 땅에 숨겨 놓은 양식인 밤을 저장하는 장소를 정확히 아는 기억력을 주셨다면 밤은 번식력이 떨어질 것이다. 밤 전체가 씨이기 때문에 다람쥐가 모두 먹어버려 종족을 퍼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벼를 수확한 논둑에서 놀다가 다람쥐가 들어가는 굴을 발견하고 그 속을 파보았더니 밤이 숨겨있었다. 볏짚을 쌓아놓은 볏짚과 볏짚 사이에 알밤이 숨겨있는 또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런데 숨겨 놓은 곳이 여러 개였고 개수도 몇 개 안되었다. 한 곳에 수북하게 갈무리해 놓았을 터인데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톨만 숨겨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밤나무 밑에 가 보니 알밤이 벌겋게 쏟아져있다. 아내와 같이 알밤 줍기에 바빴다. 다람쥐에게 한 톨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주어야 한다. .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진 것 같다. 기름이 반들반들 윤이 나고 단단한 밤은 만나처럼 영양가가 높다. 밤은 5대영양소(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비타민, 미네랄)가 골고루 들어있는 완전식품이다. 

나에게 지금 돈이 2,000원(약 $2.00)이 있는데 배가 고파 무엇을 사먹겠느냐고 물으면 나는 군밤을 사먹겠다고 말하고 싶다. 밤이 완전식품이기 때문이다. 밤벌레를 보면 밤이 완전식품인 것을 알 수가 있다. 밤을 파먹고 사는 벌레를 보면 토실토실하게 살이 쪄 있다. 아기로 말하면 우량아이다. 통통하게 살이 찐 아기를 밤벌레 같다고 한다.

내 고향 예산은 옛날부터 밤나무가 잘 자라 밤이 많이 열리고 알이 굵고 당도 또한 높다. 바로 가까운 이웃 마을은 밤이 많이 열려 옛날부터 동네이름이 ‘바암이’(大栗里대율리)이다. 그곳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온 새댁이 있었다. 친정 마을 이름을 따서 바암이덕(댁)이라 불렀다.

‘바암이’에서 생산한 밤을 예산 5일장에 가지고 와 

“바암이밤 사유“ 라고 소리 지르면 다른 밤보다 굵고 당도가 높기 때문에 금방 팔린다.

고향에 도착한 전날 바암이(대율리)에서 밤 축제가 열렸다고 했다. 요즘 사방에서 특산품 축제가 열리고 있다. 나의 고향 특산품은 밤도 있지만 예산 황토사과가 있다. 황토밭에서 열리는 사과는 맛이 좋아 전국에서 이름이 나 있다. 한 때 대구사과가 유명했지만 지금은 예산황토 사과가 더 유명하다. 아삭거리는 씹히는 맛과 당도가 높고 사과향이 다른 사과보다 훨씬 진하다.

저녁에 군밤을 구워 파티를 열었다. 주워 모은 알밤을 프라이 펜에다 구웠다. 

밤은 2번 실명(失明)하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첫 번째는 밤을 딸 때이다. 알밤으로 줍기가 일 서러워 알밤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긴 장대로 밤송이를 때려 강제로 떨어트린다. 위를 보고 밤을 털기 때문에 밤송이가 눈으로 떨어져 심하면 눈이 멀 수 있다. 

둘째 번은 밤을 구울 때 그냥 구우면 밤이 익을 때 밤 속의 증기압이 증가한다. 두꺼운 껍질 속에서 밤이 폭발하여 익는 상태를 처다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 그 중에 운이 나쁘면 눈에 맞아 실명한다. 이러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알밤 하나하나를 칼로 겉껍질에 흠을 내어 구웠다. 낮은 온도로 오랫동안 구웠다 방안에 구수한 군밤 내음이 진동했다. 겉껍질이 터진 틈으로 노릿 노릿한 속살이 들어났다. 뜨거운 밤을 손으로 까서 호호 불면서 먹었다. 찐 밤이나 생밤보다 훨씬  달고 고소했다. 

옛날 군밤을 좋아 했던 나는 퇴근길에 삭풍이 부는 겨울 추위에 떨며 파는 군밤장수에 다가가 금방 구운밤을 사가지고 집에 와 따뜻한 밤을 애들에게 줄 때 방안에 품기던 군밤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 때 그 군밤 냄새와 꼭 같다. 

고구마 굽는 냄새도 구수하지만 군밤 냄새가 더 깊고 더 멀리까지 갔다. 땅속에서 캔 고구마가 지상 4~5m 높이에서 열린 밤을 당할 수 있을까? 

식구 모두 구수하고 달콤한 군밤 맛에 취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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